[황석희의 영화 같은 하루] [142] Pain can keep the mind awake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고 가정하겠다. 또 하늘 공기 땅 빛깔 소리 및 모든 외적인 것은 섣불리 믿어 버리는 내 마음을 농락하기 위해 악마가 사용하는 꿈의 환상일 뿐이라고 가정하겠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악마의 가설’ 중 현실 세계를 추정하는 부분이다. 쉽게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AI가 인간들을 속이려 만들어 낸 가상 세계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영화 ‘힙노틱(Hypnotic∙2023∙사진)’은 현실을 가상 세계로 가린 채 서로 속고 속이는 최면술사들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감정적으로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세요?(Do you feel ready, emotionally?)” 정신과 의사가 형사 대니(벤 애플렉 분)에게 묻는다. 의사의 판단에 직업 복귀 문제가 걸린 대니는 이렇게 답한다. “일이라도 해야 안 미칠 것 같아요(I think it’s the only thing keeping me sane).” 대니는 어린 딸을 납치당한 후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일련의 괴이한 사건이 벌어진다.
대니의 눈앞에서 어떤 남자가 혼자 뚜벅뚜벅 은행에 걸어 들어가 은행을 터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누구도 현장을 기억하지 못하고 은행 직원 모두가 그자에게 협조하는 태도를 보인다. 대니가 서둘러 뒤쫓지만 그는 유령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대니는 제보자를 추적하던 과정에서 이 수법이 최면술임을 알게 된다. 결국 최면술사들의 싸움에 낀 대니, 하지만 대니는 좀처럼 최면술에 당하지 않는다. “당신에겐 방벽이 있어요. 정신적 방벽(You have a block, Detective. A psychic block).” 한 최면술사가 대니에게 말한다. 대니는 태연하게 답한다. “고통은 정신을 깨어있게 하니까요(Pain can keep the mind awake).” 그 어떤 최면술로도 딸을 잃은 고통이 지워지지 않는다. 가장 강력한 최면술사의 천적은 가장 괴로운 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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