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친절한 기계 VS 불친절한 기계
바야흐로 키오스크 세상이다. 어디를 가나 마주친다. 간단히 점심을 때우기 위해 샐러드를 사러 들른 식당에서도, 친구와 수다나 떨 요량으로 들른 카페에서도, 하물며 친구네 강아지에게 줄 선물을 사러 들른 반려동물용품점에서도 만났다. 특히 카페는 대규모 프렌차이즈는 물론이고 작은 개인 카페에서도 매번 마주쳐서 이제는 내가 먼저 키오스크가 있을 자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며 가게에 들어선다. 뻔히 손님이 나밖에 없는 가게에서도 기계로 음료를 주문하곤 하니,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과 대화 한마디 없이도 하루를 너끈히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편하다. 말 한마디 없이 길쭉한 기계를 통해서 원하는 바를 모두 얻어낼 수 있으니까. 입도 뻥긋하기 싫을 만큼 피곤했던 날은 그의 존재가 반갑기까지 했다. 간단히 장을 보러 들른 마트에서는 굳이 긴 줄을 서가면서까지 캐셔에게 직접 계산하는 일 없이, 줄이 짧은 셀프 계산대에서 직접 계산해 버리고 나서면 그만이었고, 심지어 해외여행을 가서도 키오스크가 있는 매장이라면 굳이 통하지 않는 말로 소통을 시도하기보다는 기계를 통하면 편하게 이용 가능하니 정말로 좋은 세상이다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는 그렇게나 친절하던 기계들이 누군가에겐 야속하리만치 불친절하게 구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대학 병원에서. 대학 병원에서 진료 한 번 받기란 정말이지 모든 과정이 기계와의 동행이었다. 접수 등록부터 진료실 도착 알림, 경우에 따라 채혈이나 온갖 검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원비 수납까지 모두 각기 다른 기계에서 때마다 필요한 번호표를 뽑아야 했다. 내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기계에 환자 번호나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면 당일 바코드가 프린트되어 나오니 태그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내 손에 기계가 너무나 익숙했던 나머지 다른 이에게도 이 정도 일은 거뜬할 것으로 생각했다. 기계 앞에서 바코드가 없는 진료 안내문을 연신 가져다 대며 당황하고 계신 할머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접수를 도와드리려 여쭌 주민등록번호가 ‘40′으로 시작했을 때, 순간 정신이 아득해 졌다. 1940년대라, 국사책에서나 봤던 숫자였다. 가만히 그가 맞닥뜨리게 된 2023년을 상상해본다. 말 한마디 없는 길쭉한 고철 덩어리가 얼마나 막막할까. 그러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보호자를 동행하지 않은 어르신들이 그 공간에서 부유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보이지 않던 존재가 그제야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기계들은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기술은 정말로 사람을 위해 존재할까. 많은 부분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만, 완전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건, 오히려 기술에 의해 소외되는 계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엄마 손을 끌고 무인가게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500원짜리 과자를 하나 집어 들고 “엄마 잘 봐” 하며 계산하는 법을 설명했다. 엄마는 굳이 본인이 해야 하겠냐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는 해야 된다고 대답했다. 그날을 나는 조금 서글프게 기억한다.
4차 산업혁명이니 챗GPT니 한참이나 떠들어도 그려지지 않던 내 미래가, 병원에서 만난 할머니를 통해 보였다. 기술은 나를 데려갈까 아니면 결국엔 날 버리고 떠나버릴까. 지금까지를 바라보면 뒤처지면 뒤처지는 대로, 앞서가는 사람들과 어울려 갈 수 있는 세상은 아니었으니, 결국엔 모두가 도태되는 엔딩일까. 효율만을 따지자면 이견 없이 세상이 현재 가고 있는 방향이 답이겠지만 인간사는 효율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때때로 인간사는 아주 비효율적이고 군더더기투성이였으니까. 기술의 발전과 더딘 인간의 속도를 고민해 본다. 지금이야말로 그 속도의 간극을 메우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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