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경대] 배우 이영애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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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수교 141년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 가운데 하나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다.
이승만 정부는 전제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협정 체결 후 이승만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날아가 1953년 8월7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과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방위하기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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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수교 141년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 가운데 하나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다. 1953년 10월 1일의 역사다. 세계가 주목하는 70년 연륜의 한미동맹 탄생이다.
한국전쟁은 1951년 6월 이후 교착상태에 빠졌다. 참호전과 고지전이 장기화되면서 희생만 늘어갔다. 미국은 소련의 참전으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경계했다. 신생 중국 공산당 정부는 미국의 참전을 중공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보고 두려워했다. 휴전이 화두가 됐다.
이승만 정부는 휴전 결사반대를 선언했다. 반공과 북진통일은 1948년 정부 수립 후 일관된 정책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을 북진통일의 골든타임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휴전으로 반공포로가 북송될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깜짝 놀랐다.
휴전협정은 가속도가 붙었다.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은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이승만 정부는 전제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리고 미국의 확약을 받고서야 휴전에 동의했다. 협정 체결 후 이승만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날아가 1953년 8월7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과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방위하기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상호방위조약 제2조는 ‘한국이나 미국이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의해 위협을 받을 경우 서로 협의하고 단독으로나 공동으로 자조(自助)와 상호원조(相互援助)에 의해 무력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하고 강화시킨다’고 규정하고 있다.
긴 연휴 중 국군과 한미동맹 생일이 있었다. 국민들이 휴식을 즐기는 동안 국민배우 이영애씨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지난달 12일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비용으로 5000만원을 기부했다. 이를 놓고 귀는 닫고 입만 여는 사람들이 무시해도 좋을 말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역사를 잊은 세상에 역사를 기억하는 이영애씨가 있다. 남궁창성 서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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