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 잡으려다 농촌도 잡는다… 논밭 팔 길 막혀 ‘랜드푸어’
획일적으로 강화… 논밭 거래 반토막
노후 걱정 농민들 땅 팔고 싶어도
사려는 사람 없어 농촌 황폐화 우려
부산에 사는 김민재(60)씨는 고향인 경북 청도군에 사는 어머니(82)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일이 부쩍 늘었다. 고령으로 농사를 짓기 힘들어 4795㎡(약 1450평) 규모의 논과 밭을 부동산 업체에 내놓은 지 1년이 넘었지만, 매수 문의가 아예 없다. 김씨는 “자식들은 전부 도시에서 자리 잡았고, 어머니의 노후 자금을 위해선 땅을 처분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답답한 노릇”이라고 했다.
정부가 2021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 땅 투기 사태’를 계기로 개정한 농지법이 농지 거래를 가로막아, 농촌 고령층을 ‘랜드 푸어(땅이 있지만 가난한 사람)’로 전락시키고, 농촌 소멸 현상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작년 5월 개정된 농지법에 따르면, 농업진흥지역 내에선 주말 농장 목적의 농지 취득을 금지하고, 그 외 지역에서 주말 농장을 하려 해도 직업과 영농 경력 등을 포함한 영농 계획서를 내야 한다. 농사를 짓기 위해 귀농을 하려면 지역 농지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이런 법 개정 이후 농지 거래량이 급격히 줄고 있다. 3일 한국부동산원의 토지 거래 통계를 분석한 결과, 올해 1~8월 매매 거래된 농지(전·답)는 15만7739필지로 전년 동기(22만6828필지) 대비 30.4% 급감했다. 농지법 개정 이전인 2021년 같은 기간(29만1456필지)과 비교하면 반 토막 수준이다. 농지를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지자, 농지가 노후 자금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농촌 고령층은 현금을 마련할 길이 막막해졌다. 농지를 못 팔아 금융권에서 담보를 잡히고 대출받는 경우까지 있다. 전문가들은 “농촌 인구 고령화가 심각해 도시민의 유입 없이는 농지를 받아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며 “해외에선 농지 취득 자격을 완화하는 추세인데 우리는 정반대”라고 지적하고 있다.
강원도 정선에 2만㎡ 규모의 밭을 소유하고 있는 김모(72)씨는 나이 때문에 농사를 짓기가 힘들어지자 올해 초 밭의 절반을 부동산 중개소에 내놨지만, 지금까지 사겠다는 전화를 한 통도 받지 못했다. 김씨는 “농사를 물려줄 사람도 없어 땅을 모두 처분해야 하는데, 언제 팔릴지 기약이 없다”고 했다. 올해 들어 지난 8월까지 강원도 정선에서 거래된 농지(논·밭)는 모두 489필지. 농지법 개정 이전인 2021년 같은 기간(820필지)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최근 농지 거래량이 급감한 것은 부동산 시장 침체의 영향도 있지만, 지난해 개정된 농지법이 직격탄이 됐다. 취득 절차가 무척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농지를 팔지 못한 농촌 고령층은 ‘랜드푸어’로 전락하고, 마지못해 땅을 싼값에 내놓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도시민들이 주말 농장과 귀농을 포기하면서 인구의 농촌 유입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농촌 피폐화가 점점 심각해지져 “농촌이 망해가고 있다”는 탄식마저 나오고 있다. 일부에선 농지법 개정은 농막에서 숙박을 금지했던 ‘제2의 농막 사태’라고 비판하고 있다.
◇투기 막겠다는 농지법 개정이 농촌 망친다
농지법 개정의 발단은 2021년 3월 불거진 LH(한국토지주택공사) 땅 투기 사태였다. 당시 LH 직원들이 개발 정보를 이용해 3기 신도시 예정 지역 농지를 사들였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정부는 농지 투기를 막겠다며 농지법을 개정해 작년 5월부터 본격 시행했다.
개정된 농지법은 우선 우량 농지(농지가 모여 있어 기계 농업이 가능한 농지)에 해당하는 농업진흥지역 내에선 주말 농장 목적으로 농지를 취득할 수 없게 제한했다. 농업진흥지역 이외 지역에서도 주말 농장을 하려면 직업과 영농 경력, 영농 거리(집에서 농지의 거리) 등을 기재한 영농 계획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했다. 또 외지인이 주말 농장뿐 아니라 귀농(歸農)을 목적으로 농지를 구입할 경우에도 10~20명으로 구성된 지역 농지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심의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절차 자체가 무척 번거롭게 해놨다. 경남 밀양시 무안면의 한 공인 중개업소 대표는 “간혹 소규모 주말 농장 문의가 있는데 개정된 농지법을 알려주면 발길을 돌린다”며 “농사짓는 일에 영농 계획서를 내고 농지위원회 심의까지 받으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했다.
◇경매 넘어가도 유찰만…'랜드푸어’ 양산
농지법 개정은 농지 투기를 막기 위한 것이지만, 수도권이나 도시와 멀고 개발 가능성이 거의 없는 지방에서 농사를 짓는 고령층에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됐다. 통상 농촌의 고령 농민들은 은퇴를 앞두고 농지를 정리해 생활비와 의료비 등 노후 자금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도시에 있는 자녀들도 농지를 관리하기 어려워 증여 대신 매각을 선호한다. 하지만 농지법 개정으로 농지를 현금화하기 어려워지면서 억지로 농사를 이어가거나, 생활고를 겪는 농민이 늘고 있다.
농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가, 경매로 넘어가는 농지도 늘고 있다. 경·공매 데이터 전문 기업 지지옥션에 따르면, 올해 1~9월 농지 경매 진행 건수는 1만8628건으로, 작년 같은 기간(1만5469건)보다 20.4% 급증했다. 유찰이 이어지면서 매각 가격은 수직 하락하고 있다. 지난 11일 경남 밀양시의 419㎡ 규모 논은 11차례 유찰된 끝에 감정가(879만원)의 8.6% 수준인 75만원에 팔렸다. 지난 6월에는 경남 남해군의 491㎡짜리 논이 13차 경매 끝에 74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감정가(1079만원)의 6.9% 수준이다.
개정 농지법이 랜드푸어 양산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인구의 농촌 유입을 막아 농촌 황폐화를 가속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농가 인구는 217만명 수준으로 20년 전에 비해 약 40% 감소했다. 농촌 빈집도 전국적으로 6만5000여 채에 달한다. 나현선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연구위원은 “농지 거래가 막히면, 70~80대인 농촌 고령층이 농사를 계속 짓기가 불가능해 결국 농촌이 망가질 것”이라며 “투기를 막아야 한다면 대도시에 인접한 농지나, 개발 호재로 투기 가능성이 있는 지역만 핀셋 규제를 하면 될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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