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전투기 보내달라” 6월26일 새벽 3시, 잠든 맥아더를 깨웠다

복거일 소설가 2023. 10. 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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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6·25 전쟁과 초기 대응
맥아더에게 훈장 수여하는 이승만 -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약 2주일 지난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탈환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군이 누린 우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시작되기도 전에 결판이 난 전쟁이라고 북한 지도자들은 믿었다. 김일성은 미국의 개입을 걱정하는 스탈린에게 “미군이 조선반도에 상륙하기 전에 남조선을 다 점령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전면 침공 보고를 받은 것은 6월 25일 10시였다. 이후 엇갈리는 보고들이 올라오는 상황에서도 그는 두루 살피고 멀리 내다보면서 과감하게 대응했다.

먼저, 그는 존 무초 미국 대사와 상황에 대한 의견을 공유했다. 무초는 11시 35분에 경무대로 들어왔다. 이 대통령은 당장 필요한 무기들과 탄약들을 요청했다. 절실한 무기들은 105밀리 곡사포 90문, 박격포 700문, 그리고 소총 4만 정이었다. 경무대에서 나오자, 무초는 곧바로 맥아더 원수에게 필요한 무기들과 탄약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北 공습에 속수무책, 경무대까지 위험

무초와의 협의가 끝나자,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그 사이에 그는 주미 대사관에 전화해서 활동 지침을 주었다. 장면(張勉) 주미 대사는 곧바로 국무부를 찾아 지원을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당장 필요한 무기가 전투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군의 침공은 육해공군이 동원된 입체적 작전이었다. 러시아군의 최신형 전차를 앞세운 육군의 공격은 아군을 압도했지만, 진출에 시간이 걸렸다. 해군의 상륙 작전은 아군의 분전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공군의 공습엔 아군이 대항할 길이 없었다. 후방인 서울 일대가, 심지어 경무대까지도, 북한의 공습에 노출되었다. 북한군의 공습은 미군의 파병을 막기 위해서 김포 비행장의 파괴에 집중되었다.

26일 이른 새벽에 이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관은 원수가 자고 있어서 받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새벽 세 시에 전화가 걸려왔으니, 그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다급하고 남한의 방위에 관심이 없었던 미국 정부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던 터라, 이 대통령은 그 대답에 폭발했다. “좋소.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들이 하나씩 죽어갈 터이니, 원수가 잘 주무시도록 하시오.” 이 말은 ‘미국 시민들을 하나씩 처형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일기에서 “나는 너무나 놀라 수화기를 가로막았다”고 쓴 것을 보면, 그녀도 그렇게 들은 듯하다.

그의 노성(怒聲)에 놀란 부관이 맥아더를 깨우자, 그는 맥아더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맥아더는 곧 전투기들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오전 미군 극동군 사령부의 참모가 수원 기지를 찾아서 상황을 점검했다. 그는 김정렬 공군 참모총장에게 물었다. “한국군 조종사들 가운데 F-51(머스탱) 전투기를 별다른 훈련 없이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잠시 생각한 뒤, 김 총장은 “열 명은 됩니다”고 답했다. 그 참모는 “그러면 10대를 지원할 터이니, 그 조종사들이 수원 기지에서 대기하도록 해주십시오. 내일 수송기를 보내겠습니다.”

전황 브리핑 받는 이승만과 정부 요인들 - 6·25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정부가 옮겨간 피란지 부산에서 전황 브리핑을 받고 있는 정부 요인들. 앞줄 왼쪽부터 이승만 대통령, 신익희 국회의장, 장면 주미 대사, 무초 주한 미국 대사.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그렇게 해서, 이근석 대령을 비롯한 10명의 경험 많은 조종사들이 일본에 파견되어 훈련을 받았다. 7월 2일 이들이 조종하는 전투기 10대가 수원 기지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바로 북한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대통령은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부 장관에게 “군사 지식을 갖춘 유능한 사람들 몇 명에게 자문을 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자문 회의에서 김홍일 소장이 한강에 방어선을 칠 것을 제안했다. 결국 이 방안이 채택되어 북한군의 남하를 막아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이 대통령은 상황이 위급해질 때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일을 처리했다. 자칫하면 경무대가 피습될 수 있다는 보좌진의 판단을 따라, 그는 27일 새벽 3시에 경무대를 나왔다. 북한군 전차 부대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고 경찰이 보고한 시각이었다. 차량과 기관사를 수배하느라 시간이 걸려서, 경무대 요원들이 탄 기차는 4시에야 서울역을 떠났다. 그리고 대전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대통령이 하지 않은 일들을 살펴야 한다. 부족하고 혼란스러운 정보들에 의존해서 중대한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선 어떤 인물이 고르지 않은 선택들도 그의 됨됨이와 판단력에 대해 말해준다. 무초 대사와 처음 만나 상의했을 때, 이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그러나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다. 미군이 참전한 7월 8일에야 비로소 선포했다. 그렇게 늦춘 이유는, 계엄령을 선포하면, 북한군과의 싸움에 모든 자원을 투입한 국군에 계엄 업무가 추가된다는 사정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이 하지 않은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에 항복하지 않은 것이었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난 6월 25일 늦은 밤이 그에겐 고뇌의 시간이었다. 침공한 북한군과 싸워야 하는데, 우리는 싸울 힘이 없었다.

정치 지도자로서 그는 항복을 고려해야 했다. 어차피 지는 전쟁이라면, 빨리 항복해서 피해를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가 조기 항복을 고려 대상에서 처음부터 제외하지 않았음은, 그래서 깊은 고뇌의 시간을 가졌음은, 그의 전기에 생생하게 기술되었다.

전기에 기록된 25일 밤 이승만의 고뇌

서울의 무초 대사도 도쿄의 맥아더 장군도 이 대통령에게 미국의 지원에 관해 확언을 해줄 수 없었으니, 그런 결정은 24시간가량 지난 뒤에야 비로소 워싱턴에서 나왔다. 반면에, 이 대통령은 체코슬로바키아 내전 사례 그리고 중국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에 항복했을 때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관대한 대우를 받았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남한에 진정한 군대가 없고 외국으로부터 실질적 도움을 받을 정당한 희망도 없었으므로, 침공해 온 적군을 패배시킬 가능성은 너무 작아서 절망적이었다. 그래도 이 대통령은 항복이 아니라 저항을 명령했다.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신화 뒤의 사람’)

위에서 살핀 것처럼, 북한의 전면적 침공에 대한 이 대통령의 초기 대응은 훌륭했다. 정보가 부족하고 그나마 엇갈리는 상황에서도, 그는 할 일을 하고 안 할 일은 안 했다. 군대를 지휘해본 적이 없는 그가 이처럼 뛰어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인 것은 그의 지도력의 모습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다.

[이승만 행적에 대한 오해]

‘서울 안전하니 생업 종사하라’ 방송 뒤 피신?… 학자들 “근거없는 가짜 뉴스”

軍의 “서울 고수” 방송 내용이 李의 연설과 뒤섞여 소문 퍼져

이처럼 이 대통령의 초기 대응은 감탄할 만큼 침착하고 적절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의 그의 행적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높지 않다. 그가 라디오 방송으로 ‘서울은 안전하니 생업에 종사하라’고 시민들에게 당부하고서 혼자 서울을 탈출한 다음 한강 다리를 끊었다는 얘기가 널리 퍼졌고 지금도 그 얘기가 사실로 여겨진다.

이 문제를 조사한 연구자들은 모두 그런 얘기가 근거가 없다고 언명한다. 이 대통령은 그런 방송을 한 적이 없다. 한강교 폭파도 전적으로 군사적 판단에 의한 국군 지휘부의 결정이었고 그는 관여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그가 대전에서 한 방송 연설과 국군의 선무 방송이 비슷한 시기에 나오면서, 두 방송의 내용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뒤섞인 것으로 추론한다.

서울을 떠난 이 대통령은 대구까지 내려갔다. 사흘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다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지친 터라(그는 이제 75세였다), 그는 대구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깼다. 대구까지 내려온 것을 깨닫자, 그는 곧바로 기차를 돌려서 대전으로 향했다.

그때 그는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미국이 유엔의 결의에 따라 참전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전한 드럼라이트 참사관은 그에게 “이것은 당신들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입니다”라고 언명했다. 한껏 고무된 이 대통령은 이 기쁜 소식을 온 국민들과 방송을 통해 나누었다.

공교롭게도, 이 대통령의 방송 연설에 앞서 국방부가 “국방군이 현 전선(서울)을 고수할 것”이라는 내용의 선무 방송을 했다. 선무 방송은 으레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상황을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두 방송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뒤섞이면서,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이 일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거짓 소문들은 모두 자연발생적이어서, 사람들이 쉽게 믿고 널리 퍼진다. 이제 이 대통령이 혼자 도망쳤다는 소문은 정설로 굳어져서, 그의 업적과 명성에 큰 흠집을 낸다.

이 거짓 소문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을 했다’는 주장은 증거를 하나라도 내놓으면, 증명이 된다. 반면에, ‘무엇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증명하기는 무척 어렵고 흔히 불가능하다. ‘부재의 증거(evidence of absence)’라 불리는 이 문제는 철학적, 법적 및 과학적으로 어려운 논점이다. 연구자들이 그 소문이 근거가 없다고 주장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은 이런 사정에서 나온다.

딱한 일이다. 따라서 그 소문의 내용이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평소 행태와 평생의 행적과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하는 편이 그래도 효과가 있다. 그런 지적은 그 소문의 논리적 근거가 아주 약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북한군의 침공 소식을 들은 뒤부터 서울을 떠나기까지 이 대통령이 보인 행태는 하나하나가 그 점을 부각시킨다. 더욱 강력한 논거는 그가 서울을 떠난 직후 보인 행태다. 만민공동회를 이끌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이 맞은 위험에 움츠러든 적이 없는 이 위대한 혁명가의 모습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생하게 만난다.

전쟁 닷새째인 6월 29일, 이 대통령과 무초 대사는 수원에서 맥아더 원수를 만나기 위해 경관측기 두 대로 임시 수도가 된 대전을 떠났다. 그들이 가는 도중에, (북한군의) 야크 전투기 한 대가 그들을 공격하려 시도했고, 조종사들이 골짜기 전후에서 나무 높이로 항공기들을 기동함으로써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라이프’지의 사진기자 데이비드 덩컨은 항공기들이 착륙했을 때 수원에 있었는데, 그는 그들의 도착 광경을 감동적으로 전한다. “이 대통령은 나이 많은 사람치고는 상당히 정력적인 사람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막 견뎌낸 일을 알게 되자, 그의 삶에서 그렇게 노출된 순간에도 평정한 마음을 지닌 데 대해 깊은 감탄을 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보다 더하게, 우리가 비행장 옆 들판에 서 있을 때 우리의 군화 신은 발들을 그가 내려다본 모습을 나는 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연민의 낯빛으로 땅에서 올려다보면서, 그는 말했다. ‘그런데 저 콩 싹들. 우리 발길이 저 싹들을 으깨고 있어요.’”

한국에선 많은 것들이 으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견디고 있었다.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신화 뒤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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