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의 AI시대의 전략] 반도체기업 진짜 실력, EDA로 판가름 난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입력 2023. 10. 4. 03:05 수정 2023. 10. 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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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성능 검증하는 소프트웨어… 세계 톱10 중 7개가 美 기업
수백억 개 미분방정식 풀며 반도체 설계 정확성·효율성 검증
반도체 패권경쟁의 최후 병기… 걸음마 수준 국내 기업 키워야

스위스를 여행할 때 꼭 둘러봐야 하는 장소로 중부 알프스 기슭에 위치한 ‘루체른’이라는 도시가 있다. 눈 쌓인 알프스 산맥의 산기슭에 위치하며, 시내에는 로이스강이 흐르고, 도시 가운데에는 빙하가 녹아 흘러내려 만들어진 푸르른 호수가 있다. 그 호수를 지긋이 아래로 바라보는 언덕 바위 벽에 ‘빈사(瀕死)의 사자상(獅子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 조각상은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왕궁을 끝까지 지키며 혁명군과 싸우다가 모조리 전사한 스위스 용병 786명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그렸다. 스위스 조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먼 나라 이국에서 생명을 바친 스위스 용병 선조들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조각상에 새겨진 사자는 화살이 심장을 찔렀음에도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끝까지 발밑에 지키고 있다. 충직한 용병들의 모습이다. 이처럼 스위스 용병은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실천’, 그리고 그 결과물인 ‘신뢰’의 상징이다. 지금 스위스는 시계, 정밀기계, 금융, 그리고 제약 산업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모두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이다. 스위스의 1인당 국민소득이 8만달러를 넘는다. 놀랍게도 인공지능 시대 가장 필수적인 부품인 ‘반도체’도 약속과 신뢰의 기술이다.

그래픽=백형선

생성 인공지능 학습과 생성 과정에 반드시 들어가는 반도체가 CPU(중앙처리장치)와 GPU(그래픽처리장치) 그리고 HBM(고대역폭 메모리)이다. CPU는 주로 순차대로 작업 명령을 내리는 데 사용되고, GPU는 인공지능에 필요한 수학 행렬 계산을 하는 데 이용되며, 메모리는 그 계산 결과를 기록하는 데 쓰인다. 이 세 반도체가 유기적으로 협동해서 생성 인공지능 작업을 수행한다. 마치 사람처럼 글도 쓰고, 말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작곡한다. 인간을 대신해서 전자메일도 보내고 보고서도 작성하고 발표 자료도 만든다. 그런데 이들 반도체들은 약속된 시간과 절차에 맞추어 순서대로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이때 약속을 지키는 시간의 단위가 ‘1조분의 1초(1ps)’ 단위다. 찰나보다 짧은 시간이다. 그 순간의 시간에도 반도체끼리 약속을 잘 지켜야 믿고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도체를 처음 개발할 때부터 약속을 규칙으로 정한다. 이를 ‘규격(Spec)’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규격을 정하는 작업을 표준화(JEDEC Standard)라고 부른다. 결국 반도체 사이의 약속 시간표(Timing diagram)가 규격의 핵심이 된다. 추석 귀성 열차 시간표만큼 모두에게 중요하다. 서로 기다리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설계와 공정을 마친 후 마지막 단계에서 테스트를 거친다. 테스트라고 하는 것은 반도체가 정해진 규격을 잘 지키고 있는지 다양한 환경과 조건에서 확인하는 과정이다. 온도, 전압, 속도, 그리고 동작 조건을 바꾸어 가면서 관측한다. 이러한 반도체가 테스트 과정에서 약속의 묶음인 규격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결국 실패 제품이 된다. 이때 반도체가 약속을 실천하는 비율을 ‘수율(收率)’이라고 한다. 수율이 높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은 세계시장에서 신뢰를 얻는다. 시장은 가격과 주문 물량으로 보답한다. 삼성전자와 TSMC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는 3나노미터(nm) 파운드리 공정의 경쟁도 결국 수율에서 판가름이 난다.

그래픽=백형선

이러한 반도체 테스트 과정에서 제품 성능이 규격을 만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이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은 치명적이다. 따라서 설계 단계에서 규격을 만족하는지 사전에 충분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때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법이 사용된다. 검증용 시뮬레이션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도구를 ‘EDA(Electrical Design Automation·전자 설계 자동화)’라고 부른다. EDA는 설계 검증 과정에서 반도체 내에 존재하는 수백억개의 트랜지스터 숫자만큼이나 많은 수학 미분방정식을 풀고 해석한다. 그 결과로 반도체의 동작을 예측하고 약속한 규칙대로 주어진 작업을 시간 내에 수행하는지 확인한다. 따라서 EDA를 이용한 반도체 설계 검증 과정의 정확성과 효율성이 바로 반도체 기업의 진짜 숨은 실력이다.

전 세계 EDA 시장은 2019년 14조원에서 2026년에는 25조원 규모로 급격히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런데 전 세계 10대 EDA 기업 중 7개가 미국 기업이다. 그 외에 독일, 일본, 오스트레일리아가 각각 1개씩 기업을 갖고 있다. 10대 기업에 우리나라, 대만, 중국 기업은 없다. 반도체의 실제 경쟁력 순위는 바로 EDA 기업 순위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주도권을 갖는 이유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중소기업으로 폴리오그(Polliwog), 바움디자인시스템즈(Baum)와 알세미(Alsemy) 등이 척박한 환경에서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다. EDA는 반도체의 지정학적 패권 전쟁에서 마지막 단계에 사용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기술 통제 수단이다.

이처럼 반도체는 시장에서 확인되는 신뢰가 곧 경쟁력이다. 마찬가지로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 그리고 국가의 가치도 그 신뢰의 정도로 정해진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회가 가져오는 잠재적 비용은 엄청나다. 약속을 확인하는 사람들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다행히 반도체 메모리와 인공지능은 약속을 끝까지 기억한다.

스위스에서는 가족과 국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용병을 해외로 보냈다. 우리도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냈고, 뜨거운 중동 사막에 건설 근로자들을 파견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남태평양에도 원양어선 선원들을 보냈다. 그들은 고국의 가족과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면서 약속을 지켰다. 스위스의 ‘빈사의 사자상’은 화살을 맞고 쓰러져 가면서도 끝까지 발 아래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지키고 있다. 지금 우리도 반도체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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