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성급한 세리머니

김태훈 논설위원 2023. 10. 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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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미국에서 몇 해 전 3000m 달리기에 출전한 선수가 1위로 달리다가 결승선 수십m 전부터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세리머니를 했다. 10m 넘게 뒤처져 달리던 다른 선수가 이걸 보고 전력질주해 결승선 2m 앞에서 추월했고 우승을 빼앗긴 선수는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떨궜다. 유튜브엔 성급한 세리머니를 펼쳤다가 낭패를 겪은 경기 동영상이 돌아다닌다. 축구 페널티킥이 골대를 맞고 튕겨나가자 골키퍼가 기쁨의 세리머니를 펼치며 골문을 비운다. 그런데 튕겨나온 공이 회전을 먹어 빈 골문으로 들어가고 이번엔 실축한 줄 알았던 선수가 환호한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롤러 스케이팅 남자 스피드 3000m 계주 결승에 나선 한국팀이 다 잡았던 금메달을 놓쳤다. 레이스 내내 맨 앞에서 달렸지만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선두를 내줬다. 그 차이가 0.01초였다. 마지막 주자가 결승선 통과 직전 두 팔 들어 금메달 세리머니를 미리 한 게 화근이었다. 역전 우승을 이룬 대만 선수는 “상대가 축하하는 동안 여전히 내가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호주전 역전패 단초도 성급한 세리머니였다. 2루타를 친 우리 선수가 더그아웃을 향해 손을 번쩍 드는 자축 세리머니를 하다가 베이스에서 발이 떨어졌다. 호주 2루수가 기다렸다는 듯 태그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호주 선수는 “어쩌면 아웃을 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순간에 최선을 다한 것이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를 지낸 공격수도 유럽 리그에서 비슷한 실수를 했다. 시즌 첫 골을 터뜨리고 공중제비를 돌다 무릎을 다쳐 교체됐고 공격수를 잃은 팀은 역전패했다.

▶많은 선수가 우승의 순간을 그리며 세리머니를 연습한다. 세리머니를 연습하며 땀과 고통에 맞서는 힘을 얻기도 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이용대가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금메달 확정한 뒤 카메라를 보며 한 윙크 세리머니는 지금도 많은 국민 기억에 멋진 세리머니로 남아 있다.

▶‘세리머니’의 매력은 멋진 제스처가 아니다. 그 직전까지 선수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에너지의 관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작에 관중은 절로 환호하게 된다. 피니시라인을 깨부수듯 치고 들어온 스프린터가 활짝 가슴을 펴며 환호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최선을 다한 뒤 받아든 결과를 자축하는 세리머니라면 국민도 함께 축하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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