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과장에게 브리핑 맡긴 박정희의 관료 ‘용인술’
박정희 대통령은 공무원들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청와대만 바라보며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관료가 박 대통령에게 충성한 건, 단지 목표와 가치를 공유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통령은 ‘종신직’이란 인식이 컸다. 전직 고위 관료는 “그때 공무원들은 스스로를 삼성·현대처럼 오너가 있는 대기업의 사원, 곧 ‘박정희 주식회사’ 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통령의 통치철학에 100% 자신을 맞추는 게 당연했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관료①제3공화국 초기인 1964년, 경제기획원 공공차관과 과장(서기관)이던 황병태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경제동향 보고회의에서 브리핑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야심 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본격 추진하던 시기였다. 경제동향 보고회의는 대통령과 경제부처 장·차관, 공화당 서열 2위인 당 의장(서열 1위는 당 총재인 대통령)과 정책위의장, 한국은행·산업은행 총재까지 참석하는 매우 비중 있는 월례 회의였다.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부처 국장도 아닌 과장급이 브리핑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황병태씨(나중에 통일민주당·신한국당 국회의원과 주중대사를 지냈다)는 “어느 회의에선가 대통령이 (경제기획원) 국장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담당 과장이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손을 들었더니 나한테 계속 질문을 했다. 꽤 오래 질문답변이 오고 갔는데, 그 뒤 경제동향 회의 브리핑을 하라는 업무가 떨어졌다. 뜻밖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다”고 말했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고건 전 국무총리는 내무부 새마을담당관(부이사관)을 하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했던 기억을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1972년 어느 날 김현옥 내무부 장관이 나를 불렀다.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경남과 경북 경계에 있는 동대본산 녹화사업 보고를 내가 직접 하라는 거였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발표 10분쯤 지나서야 4~5m쯤 앞 의자에 앉은 대통령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이 보고 얼마 후에 ‘내무부 장관 귀하. 국토 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 보고할 것’이란 내용의 대통령 친필 메모가 내게 전달됐다. 그렇게 부이사관으론 매우 드물게 국가 주요정책인 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내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게 됐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 대표적인 ‘민관 합동’으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산림녹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관료를 잘 활용해서 공직 사회를 움직였다는 예시로 꼽힌다. 황병태 전 주중대사는 “그때는 대통령과 관료들이 국가발전과 경제개발 목표를 강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그 점에서 박 대통령은 관료를 아주 잘 다룬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시절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을 관료들이 열성적으로 이해하고 따르던 시기라는 데엔 많은 이가 동의한다. 박 대통령 집권 18년 동안 대통령과 관료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군부와 행정 엘리트가 결합한 정부였다.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등 권력기관은 군 출신 인사들이 맡고, 경제 부처는 고시에 합격한 관료들이 맡았다. 3공화국 시절 박정희 정부에서 군인 출신 장관 비율은 37.8%, 관료 출신 장관은 29.3%로, 군인과 관료가 내각의 70% 가까이 차지했다. 관료 출신 장관의 비율은 1972년 유신 이후(4공화국)엔 34.9%까지 높아져, 군인 출신 장관 비율(31.8%)을 앞지를 정도가 됐다.
연평균 9% 넘는 고도성장을 이끈 개발독재의 실무 주역은 엘리트 관료들이었다. 박정희 정부에서 관료 기구는 급속도로 확장됐다. 인구 1천명당 공무원 수는 1960년 9.22명에서 1970년 13.28명, 1980년엔 15.93명으로 늘었다. 관료를 지휘하고 통제하는 사령탑인 청와대 비서실도 덩달아 커졌다. 박정희 정부의 초기 대통령 비서실 직원은 48명에 불과했지만, 1980년 5공화국으로 넘어갈 무렵엔 200명을 훌쩍 넘었다.
박 대통령은 관료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1963년 발족한 경제기획원은 정책 기획과 조정, 집행까지 모두 책임지는 핵심 관료조직이었다. 경제개발 정책은 여기서 수립되고 집행됐다. 국민 요구를 수렴하는 통로인 국회는 영향력을 잃었다. 집권여당도 마찬가지였다. 중요 정책을 사전에 조율하는 당정협의회가 3선 개헌 전인 1968년엔 29회 열렸지만, 유신 이후인 1973~79년 7년 동안엔 15회밖에 열리지 않았다. 정책 수혜자인 다양한 이해집단의 요구도 무시됐다. 높은 효율만 추구하는 행정은 상당 부분 노동자·농민 등 기층 민중과 아직 미성숙한 시민사회의 배제, 공공 이익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공무원들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직 청와대만 바라보며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관료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한 건, 단지 목표와 가치를 공유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시절 공무원들은 정권이 바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대통령은 ‘종신직’이니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충성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1970년대 사무관으로 중앙부처에 입부해 장관까지 지낸 인사는 “그때 공무원들은 스스로를 삼성·현대처럼 오너가 있는 대기업의 사원, 곧 ‘박정희 주식회사’ 사원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대기업보다 더한 왕조 국가의 신하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그러니 출세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통치철학에 100% 자신을 맞추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고 말했다.
또다른 전직 고위 관료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공무원이 박정희 대통령의 철권통치를 지지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독재에 비판적이거나 소극적인 공무원은 중간에 철저하게 배제되고 도태됐다. 다만 그런 도태 과정을 피해서 생존한 공무원들에겐 대통령만 바라보고 능력을 보이면 승진할 수 있다는 분위기는 있었다. 공직 사회 전반에 능력주의 분위기가 지금보다 강했던 건 사실이다.”
1987년 개헌 이후 5년마다 대통령이 교체되면서, 박정희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관료들은 직면했다. 사회 전반에 민주주의가 확산하면서 외부의 간섭 또는 감시를 받지 않고 정책을 입안·집행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국회와 시민사회 단체의 영향력이 커졌다. 정부 고위직일수록 정치적 연줄에 따라 임명되는 ‘낙하산 인사’가 많아졌다. 효율성보다 이해충돌의 조정이 더 중요해졌다.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는 77명의 공사 희생자(공식 기록. 비공식으론 사망자가 수백명에 이를 거라는 추정도 있다)를 내며 29개월 만에 완공됐다. 반면에 2004년 개통한 경부고속철도는 도롱뇽 서식지 보호 문제로만 원효터널(천성산터널) 공사를 6개월 동안 중단해야 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한국의 관료제와 민주주의’란 논문에서 “민주화 이후는 대통령 임기의 끝이 정해져 박정희 시대와 다른 조건을 관료제에 마련해줬다. 정치적 리더십이 타격을 받는 상황이 되면 관료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정책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특히 임기 후반엔 대통령이 지시한 사항이 관료 조직의 이해관계에 배치될 경우,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그 지시를 사실상 무력화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장관을 지낸 전직 고위 관료는 “박정희 대통령이 관료 체제의 속성을 알고 잘 활용해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고 하는데, 그 공과를 엄밀히 따져볼 필요는 있다. 관료를 앞세운 박정희 시대의 ‘관리 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엔 운이 많이 따랐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베트남 전쟁과 1차, 2차 오일쇼크가 기업 부실과 중공업 중복 투자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줬다. 박정희 시대엔, 특히 유신 시대엔 관료가 주요 경제 장관을 다 차지했고 성과를 거뒀다. 이게 관료들의 특출한 재능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본 등 앞서간 나라를 따라가는 재주가 탁월했기 때문인 측면이 크다고 본다. 그게 한국 관료제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지금은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8년 2월 출범한 박근혜 정부 초대 내각의 장·차관 35명 가운데 무려 26명(74%)이 관료 출신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이 비율은 정치를 경원시했던 이명박 대통령의 초대 내각 장·차관의 관료 편중(41명 중 27명, 66%)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인사 스타일을 보고 자란 박근혜 대통령으로선 군 출신을 기용할 수 없으니 관료에 더욱 의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위직의 관료 의존이 강한 건 윤석열 정부도 다르지 않다. 윤 대통령이 취임 초기 임명한 장관급 29명 중 21명(72.5%)이 관료 출신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 1기의 장관급 중 관료 비율(32명 중 14명, 43.8%)보다 월등히 높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이를 두고 윤석열 정부에선 엘리트 관료가 부활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런데 관료 의존 비율이 높은 박근혜 정부나 윤석열 정부에서 오히려 관료들이 움직이지 않고, 일찌감치 공직 사회 분위기가 임기 후반기를 보는 듯하다는 말이 나오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 다음 회엔 ‘대통령과 관료’ 두번째 이야기가 실립니다.
박찬수 I 대기자
한겨레신문사에서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 한국 진보운동의 과제를 담은 <진보를 찾습니다>(2021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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