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압송 이틀 뒤 사진, 얼이 나간 표정에 눈에 어린 공포

한겨레21 2023. 10. 3.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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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6·10 만세운동의 배후 조선공산당의 학생운동 지휘부였던 권오상
경찰 압송 뒤 혹독한 고문 당해, 보석으로 출감했지만 향년 28로 사망
종로경찰서로 압송된 이튿날 취조 도중에 찍은 형사 피의자 권오상의 식별 사진. 1926년 8월3일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6·10 만세운동이 벌어진 그날(1926년 6월10일), 서울 시내에서 학생 150여 명이 체포됐다. 거리시위에 가담한 혐의였다. 이틀 뒤에는 ‘조선 독립 만세 사건의 계획자’로 지목된 학생들이 속속 검거된다는 신문 기사가 떴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권오상(26), 박하균(24), 홍명식(22)과 경성제국대학 예과 학생 이천진(23), 중앙고보 5학년생 이선호(19) 등이 그들이다.1

이 5명은 ‘사건의 최초 실행자’로 지칭됐다. 순종 황제의 장례식날에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하고, 미리 인쇄기와 활자를 사들여서 불온 유인물을 대량 제작한 혐의를 받았다. 이 중에서 권오상이라는 학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점이 눈에 띈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2~7살 더 많다. 하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이유는 이 기사가 오보라는 점이었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권오상과 박하균은 이때 체포되지 않았다.

안동에서 체포 뒤 종로로 지체 없이 신병 인도

권오상의 수배 생활은 오래 계속됐다. 한 달이 지난 7월15일에는 잠적했던 학생이 마침내 검거됐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도피 중이던 동료 박하균이었다.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돼 취조받고 있다는 기사였다. 다행스럽게도 권오상의 이름은 거기에 없었다. 그 대신에 여전히 종적을 감춘 학생 만세 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받았다.

비합법 수배자 생활을 이어가려면 나날의 식사와 교통을 가능하게 할 금전의 여력이 있어야 했다. 또 도망자를 감춰주고 재워줄 수 있는 연고자가 있어야 했다. 장기 비합법 활동에 들어간 권오상에게는 이 두 가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탄압 경험이 풍부한 경찰도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가족, 친지, 지인 등과 같은 연고자의 집을 수색하거나 압박했다.

결국 사건 발생에서 한 달 20일이 지난 시점에 권오상은 체포됐다. 1926년 8월1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서면 가곡리 고향 마을에서 안동경찰서 형사들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의 신병은 이튿날 지체 없이 6·10 만세운동 수사 관할 기관인 종로경찰서로 압송됐다.2

종로경찰서에서 찍은 권오상의 사진이 있다. 그해 8월3일에 촬영했다. 범죄 피의자의 이미지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수사기관이 강제로 찍은 식별용 사진이다. 눈, 코, 귀, 입과 얼굴 윤곽이 다 드러나게끔 사진 속 주인공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얼굴 생김새가 세로로 긴 점이 눈에 띈다. 눈에는 공포감이 서려 있고, 입을 헤 벌리고 있다. 얼이 나간 듯한 표정이다. 셔츠 앞 단추가 풀어 헤쳐져 있다. 비인간적인 취조실에서 막 끌려나온 상태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종로경찰서에 압송된 날이 8월2일이고, 촬영 날짜가 그 이튿날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사진은 그가 종로경찰서에 도착함과 동시에 혹독한 취조를 받았고, 가혹행위가 밤새워 계속됐으며, 그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됐음을 보여준다.

‘조선독립 만세 사건의 계획자’로 지목된 네 학생의 신문 보도 사진. <조선일보> 1926년 6월12일치 석간 2면. 위에서 둘째가 권오상이다.

현재 남아 있는 사건 기록을 보면, 일본 관헌의 취조 방향은 뜻밖이었다. 6월10일의 학생 시위를 어떻게 계획했는지 추궁하리라 예상했지만 실제는 그와 달랐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에 어떻게 가입했는지, 입당 뒤 활동상은 어떠했는지가 그들의 관심사였다. 검사신문조서에 따르면 “피의자는 올해 2월 경성 수창동 조두원의 집에서 그 사람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는가?” “입당 후 경성 제7야체이카(세포)에 배속되어 2~3회 야체이카 회의에 출석한 일이 있는가?” 등이 주된 힐문 내용이었다.3

당원 명부 확보하고 압박한 일본 경찰

6월10일 시위 사건은 이미 수사가 종료됐기 때문이다. 그 사건으로 체포된 학생은 200여 명이고 그중 72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6월24일 검사국은 그중 11명을 기소하고 다른 61명을 기소유예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했다. 요컨대 시위 발발 2주 만에 사건 수사는 사실상 끝났던 것이다. 공판 날짜를 기다리는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6월10일 시위 사건의 관련 여부를 캐는 것은 철 지난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추궁 탓에 권오상은 당황했던 것 같다.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일관된 진술 전략을 제때 짜는 데 실패했다. 그는 진술 초기에 비밀결사 입당 사실 자체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일본 경찰이 증거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증거는 6·10 만세운동 관련 수사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드러났다. 조선공산당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경찰은 7월17일 마침내 책임비서 강달영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은닉해둔 증거 뭉치를 찾아냈다. 기밀문서 30여 종이 들어 있는 가죽가방을 적발했다.4 그 속에는 난해한 암호로 작성된 ‘당원 명부’가 들어 있었다.

권오상이 체포된 시점은 당원 명부가 발각된 지 10여 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일본 경찰은 권오상이란 이름이 그 속에 기재돼 있음을 이미 인지했다. 입당 사실을 부인하는 권오상의 초기 진술은 전혀 통할 수 없었다.

결국 진술 번복이 불가피했다. 입당 사실을 시인해야 했다. 권오상은 강제입당론을 생각해냈다. 입당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만, 자의로 그런 게 아니라는 논리였다. 입당 권유를 받고서 반동분자 취급을 받지 않으려고 자의에 반해 억지로 그에 응해야만 했노라고 진술했다. 따라서 조직활동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야체이카에 배정됐다는 말을 전해 듣긴 했지만, 그 회의 석상에는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내 활동의 진실을 은폐하는 데 적합한 논리였다.

진술의 일관성을 지킬 수 없었던 대가는 가혹했다. 몇 차례 진술 번복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급기야 건강을 잃고 말았다. 권오상은 옥중에서 ‘폐병과 뇌병’을 앓았다.5

권오상의 사망을 전하는 신문 기사. <동아일보> 1928년 6월8일치 2면. 권오상의 자필로 보이는 글씨가 소개됐다.

5명으로 이뤄진 당내 학생 야체이카의 일원

권오상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비밀결사 활동의 진실은 무엇일까? 오늘날 접할 수 있는 사료 여건에 비춰보면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첫째, 권오상은 조선공산당 내에서 학생운동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5명으로 이뤄진 당내 학생 야체이카의 일원이었다. 책임자 정달헌을 비롯해 권오상, 이병립, 윤기현, 조두원이 그 멤버였다. 이들은 서울의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 대학 내에서 학생들을 조직하고 의식화하는 일을 임무로 삼았다. 말하자면 서울 지역 학생운동의 비밀 지휘부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야체이카 성원들은 각 학교 내부에 비밀 독서회를 조직하고 그것을 확장하는 데 힘썼다.

야체이카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같은 공개 학생단체에도 적극 참여해 학교 간 연대를 가능케 하는 매개체로 활용했다. 1926년 3월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일한 도서관인 경성도서관을 계속 존속하게 하려는 캠페인을 열었는데, 그 실행을 위한 3인 대표자(권오상·정달헌·조두원)가 모두 다 당내 학생야체이카의 성원이었다. 또 그 단체의 집행위원 24명 중에는 당야체이카 성원 4명이 이름을 올렸다. 보기를 들면 권오상은 서무부 집행위원이었다.6

둘째, 권오상은 6·10 만세운동에서 학생층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당내에 설치된 ‘학생 프락치야(대표단)’의 멤버였다. 프락치야란 공개운동단체를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기구를 가리킨다. 그 구성원은 당야체이카 5인 멤버에 김형태(권오설의 가명)가 가세해 6인이었다. 이들이 바로 6·10 만세운동을 이끈 당내 핵심 집행부라 할 수 있다. 이 중 정달헌과 조두원은 그해 5월12일자로 모스크바 유학 대상자로 결정됐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7 또 권오설은 만세운동 사흘 전에 체포됐음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권오상·이병립·윤기현 3인이 실질적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월10일 시위 직후에 권오상이 ‘조선 독립 만세 사건의 계획자’로 지목돼 수배 상태에 놓인 것도 다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아내와 부인을 남기고

권오상은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재판받았다.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건강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그리하여 1928년 5월15일 보석으로 출감했다. 그러나 병세가 위중해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그해 6월3일 고향인 안동군 풍서면 가곡리 419번지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스물여덟 살 젊은 나이였다. 이승에는 아내 정씨 부인과 어린 아들 권사혁이 남겨졌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참고 문헌

1. ‘사건을 계획하기는 최고학부생들’, <조선일보> 1926년 6월12일

2. ‘연전생 압송’, <동아일보> 1925년 8월5일

3. 朝鮮總督府檢事 中野俊助, ‘被疑者 權五尙 訊問調書(제2회)’, 1926년 8월18일, <李鳳洙(治安維持法違反)>, 경성지방법원검사국 문서, 국편 한국사DB https://db.history.go.kr

4. 경성종로경찰서장, ‘京鍾警高秘제9838호,朝鮮共産黨檢擧ノ件’, 1926년 8월8일, 김준엽․김창순 공편,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 2)> 고려대학교출판부, 94쪽, 1980년

5. ‘위중한 權五尙, 보석되어 귀향’, <동아일보> 1928년 5월18일

6. 京城鐘路警察署長, ‘京鍾警高秘제8819호,主義者連絡關係に關する件’, 26쪽, 1926년 7월13일. <思想問題に關する調査書類 2>, 경성지방법원검사국문서, 국편한국사DB https://db.history.go.kr

7.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비서부일기’, 1926년 3월12일~5월14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23쪽, 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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