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99] 세상을 환히 비추는 부처의 모습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입력 2023. 10. 3. 03:06 수정 2023. 10. 3.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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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 불밝힘굴, 2006년, 종이에 수묵, 190.5×177.4㎝, 경주 솔거미술관 소장.

장쾌한 산머리에 보름달이 떠오른 줄 알았다. 다시 보니 석굴암이다. 산 아래 울창한 소나무가 둘러선 너른 기슭에는 불국사가 있다.

현대 수묵화의 거장 소산 박대성(小山 朴大成·1945~)은 젊어서 내리 여덟 번 국전(國展)에 입선하고, 중앙미술대전에서도 1, 2회 연이어 최고상을 받았다. 이후 중국, 히말라야, 뉴욕 등 세계 곳곳을 답파한 화가가 1996년 겨울 어느 날 불현듯 불국사를 찾았다. 해 질 녘 노송 아래서 바라본 불국사의 웅장함에 넋을 빼앗긴 그는 다짜고짜 일 년간 머물며 절집을 그릴 테니 요사채 한 칸을 내달라 떼를 썼다. 대중 회의 끝에 절에서는 ‘본분을 이루도록 돕는 게 도리’라며 방을 내줬다. 오늘날 그가 그린 불국사 전경은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 국적과 문화를 초월해 관람객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김대성이 지은 불국사를 박대성이 그렸다고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신라 재상 김대성이 각각 현생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중건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불국사는 토함산 서쪽, 석굴암은 동쪽에 있어 이 그림처럼 한눈에 두 곳이 다 들어오는 시점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로지 먹 하나로 삼라만상을 그려내는 수묵화는 처음부터 추상과 개념의 예술이 아닌가. 반듯하게 터를 잡은 불국사가 현생이라면, 거기서부터 좁고 가파른 길 하나로 연결된 험준한 암산 꼭대기의 석굴암은 내세인 셈이다. 어쩌면 삶이라는 게 이렇게 길게 이어진 과거, 현재, 미래를 따라 걷는 일인지 모른다. 그 끝에서 환히 불을 밝히고 내려다보는 부처가 있으니 인적이 없어도 음산하지 않다. 워낙 높이 떠 있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을 환히 비추는 부처의 모습이 마치 보름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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