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순댓국은 추석 아침에 사올 거니?
차례 줄이는 가족 늘어
지낼 자손 줄어들수록
간소화는 선택 넘어 필수일지도
“그럼, 순댓국은 낼 아침 나가서 사올 거니?”
친구 A는 지난 28일 추석 전날 시어머니에게 이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고 했다. A가 시어머니에게 ‘순댓국’ 얘기를 꺼낸 것은 며칠 전이라고 했다. 결혼 16년 차 대기업 부장 워킹맘인 그에게 매년 설·추석 명절은 남자로 친다면 군대 화생방 훈련과도 같았다.
명태전·육전을 부치고, 문어 삶고 토란국 끓이는 것을 ‘디폴트(기본 설정 값)’로 여기는 차례상. A는 올해 큰맘 먹고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머니, 돌아가신 아버님이 육전이랑 토란국 좋아하셨어요?” “아니, 그 양반은 소주에 순댓국만 찾았지. 전은 기름지다 싫어했고, 토란국도 안 먹었고.” “그럼 차례상을 아버님이 좋아하지 않았던 음식으로 차리는 거네요. 순댓국 한 그릇 올리면 더 좋아하실 텐데.” “….”
A와 가족들은 결국 올해 추석에 순댓국 한 그릇 올리고 차례를 지냈다. 부엌에서 매년 음식 하느라 땀 흘렸던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은 가족들과 거실에서 커피 마시며 못 나눈 이야기를 했다. A는 말했다. “시어머니가 ‘차례를 지내고 이렇게 맘이 가벼운 건 처음’이라고 해서 놀랐어.”
2023년에도 ‘차례상’은 뜨거운 키워드다. 누군가는 ‘아직도 차례를 지내야 하느냐’고 묻고, 반대편에선 ‘그래도 지내야 한다’고 한다. 재미있는 대목은 코로나 확산기를 거치면서 ‘그래도 …’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확연히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본지가 롯데멤버스와 지난 15일~16일 성인 남녀 4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절반 넘는 이들은 “올해 추석엔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했다. 남성은 49.7%, 여성은 61.2%였다. 차례를 안 지내는 이유에 대해 22.9%는 “요즘 시대와 맞지 않아서”라고 답했고, 16.6%는 “가사노동과 스트레스가 부담돼서”라고 했다. “고물가로 인한 차례 비용 부담이 커서”는 12.8%였다.
코로나 확산으로 온 가족이 반드시 모이지 않아도 되는 소위 ‘비대면 명절’을 겪으면서 우리는 명절이 끝나도 이혼율이 뛰어오르지 않는 경우를 처음으로 목격했고(2020년 통계청), 명분 없는 가사 노동에서 벗어났을 때의 평온함도 맛봤다. 한 대학병원이 명절 이후마다 실시하는 ‘스트레스 심각도’가 남녀 모두 제일 낮았던 해가 2020년이다.
고물가도 차례상을 줄이거나 차례를 건너뛰어도 좋다는 명제에 동의하게 만든 모양이다. 지난 29일 추석 당일 서울 한 중구의 가성비 좋기로 유명한 한 패밀리 레스토랑은 점심 340여 좌석이 모두 만석이었다. 명절 당일 차례 대신 외식하는 가족이 늘었기 때문이다.
저출산 현실도 전통적인 차례상을 계속 고수할 수 있을지 질문을 계속 던진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전체 인구 15.7%였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2030년 25.5%, 2050년 41.5%, 2070년 50.2%로 늘어나게 된다. 청·장년, 유소년 인구 비율은 그만큼 줄어든다. 차례상을 받을 어른은 늘고, 차례 지낼 자손은 모자라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차례를 지내는 분들의 정성과 마음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제 차례상 간소화는 선택을 넘어선 필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명절 막바지 무렵이면, 맘카페엔 이런 글이 올라오곤 한다. ‘여러분은 본인 죽고 제사·차례상 받는다면 자식에게 어떤 음식 올려달라고 할 거예요?’ 댓글은 수십개다. ‘치즈 케이크요.’ ‘전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이면 돼요!’ 눈에 밟히는 답도 있다. ‘그냥 쉬라고 할 거예요. 내가 21세기에도 못 누린 홀가분한 명절, 너희는 만끽하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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