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의 클래식感]시월 하늘, 거대한 空으로 영혼을 빨아들이는
하늘이 푸르고 대기가 청명한 날, 높은 건물의 창가에 서 있으면 150년 전 태어나 80년 전 타계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 피날레가 들려오는 것 같다. 피아노 솔로가 깊은 저음으로부터 두둥실 떠오르고, 금관악기들이 코끼리 떼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낸다. 나도 그 소리들과 함께 떠오른다. 지금 날아가고 있구나.
이윽고 빌딩 숲이 시선 아래 깔리고, 옥상마다 헬리포트 표시가 보이고, 저 멀리 산들이 무릎 아래로 내려오고, 고개를 들면 성층권을 벗어나기 시작하는지 깊고 어두운 청색이 시야를 채운다. 보라, 나는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계절의 맑은 대기는 천금을 주고라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이른 퇴근길, 차창 밖으로 조금씩 불 켜지는 강 건너의 빌딩들까지 너무나 가까이 보여서, 도시 전체가 내 것 같은 들뜬 착각이 든다. 이럴 때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6번 ‘대관식’의 3악장을 듣는다. 그 명징한 리듬과 화음에 알 수 없는 기대가 깃든다. 버스 정류장에서 활짝 웃으며 집으로 뛰어가던, 어린 어느 날의 내가 겹쳐진다.
이런 날에는 청명한 북유럽의 늦여름이나 초가을을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20여 년 전 처음 가본 핀란드의 헬싱키와 에스토니아의 탈린도 그랬다. 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는 청년기에 크리스티안 2세 왕이라는 연극을 위한 음악을 썼다. 16세기 스칸디나비아의 왕을 그린 작품이다. 모음곡 중에서 사랑의 장면을 나타내는 첫 곡 ‘녹턴’이다. 현의 쓸쓸한 노래가 따끔따끔하니 선뜻한 청량감으로 옷 속을 간지럽힌다.
센티멘털리즘의 대가인 북방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관현악 모음곡 3번의 첫 악장 이름을 엘레지(슬픈 노래)라고 붙였다. 쓸쓸한 가을날의 아련한 회상, 기억 저편에서 몰려오는 후회와도 같은 슬픈 노래다. 그 주선율은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차이콥스키의 초기 가곡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를 변주한 것과 같다.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안다/내가 무엇을 괴로워하는지/홀로, 모든 기쁨에서 떨어져 나와/나 먼 창공을 바라보노라.’
그 차이콥스키의 피아노곡 ‘사계’는 일 년 열두 달의 서정을 한 곡씩의 피아노곡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 10월은 문호 톨스토이의 사촌인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시를 표현했다. ‘가을, 우리의 가련한 정원이 떨어져 내린다. 노랗게 변한 잎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시월도 끝을 향하면 차츰 어두운 날이 많아진다. 코트 깃은 점차 높아지고, 마음의 눈은 자꾸만 자신의 안쪽을 들여다본다. 하염없이 걸으며 그곳에 깃든 그림자를 지워보려 하지만 때로 세상은 뭔가 불길한 일을 준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는 예언서 같고 묵시록 같은, 쇼팽의 발라드 1번을 듣는다.
그 어두운 하늘의 정경 아래 베토벤으로부터 100년 후의 교향악 대가 말러의 교향곡 6번의 느린 악장이 겹쳐진다. 말러는 이 악장에서 알프스 산속 마을의 산책과도 같은 고요한 정경을 그린다. 언뜻 생각하기에 너무도 평화로운 정경이지만, 이 곡은 놀랄 만한 반전과 경악을 숨겨두고 있다. 이 교향곡의 제목을 말러는 ‘비극적’이라고 붙였던가.
점차 해는 짧아지고, 일찍 땅거미가 진다. 따뜻한 사람들의 사이에서 위안을 찾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마음속에 일어난 거스러미와 딱정이를 혼자 다독여야 하는 저녁도 있다. 푸치니 오페라 ‘수녀 안젤리카’ 중에서 간주곡을 들어본다. 내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는 푸치니는 한밤에서 새벽에 이르는 정적의 시간을 사랑했고, 이를 자주 자신의 극에 밀도 높게 표현한 작곡가였다.
기분 좋게 몸을 간질이던 공기는 어느덧 선뜻함으로, 다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추위로 다가온다. 푸름을 자랑하던 들판은 노랗게 변했고, 한해살이들은 다음 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거둘 준비를 시작한다.
성경 전도서의 구절에 곡을 붙인 브람스 독일 레퀴엠 2악장을 듣는다. “모든 육신은 들의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니….”
저 들판은 곧 마른 풀들로 뒤덮일 것이다. 저 엄숙한 소멸을, 부활을 기다리는 긴 시간을 묵상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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