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석의 들춰보기-추석의 다음 차례[문화칼럼]

이선명 기자 2023. 10. 2. 20:5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추석에는 이제 차례를 지내지 말자”

보수적인 경상도 남자, 아버지가 저 말을 내뱉었다. 명절은 앞으로 설날만 모여서 차례를 지내고 추석은 쉬자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말이었다. 사람을 지역으로 특정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평생 바라보아온 아버지의 모습은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것을 쉽게 깨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셨다.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지 말자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평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새해는 뜻깊다. 새로운 1년 계획도 작성해보고, 작년에 좋지 않았던 모든 일들을 버려두고서 새해에는 좋은 일들만 일어나길 기원해보기도 하고 매일 떠오르는 태양 앞에 굳이 추운데도 그날만큼은 밖으로 나가서 해돋이를 보는 맛이 있다. 설날은 그만큼 할 이야기도 많고 서로에게도 덕담이 넘쳐난다. 하지만 추석은 애매하다. 농경 사회에서야 한 해 농사를 되짚어보고 감사를 표하는 것이 큰 의미였겠지만 지금은 이촌향도라는 말 자체도 구시대의 말이 되어버렸다.

농촌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최근 벌초를 하러 오랜만에 시골로 내려갔더니, 조상에게 감사하는 흔히 말하는 토테미즘에 기댄 무언가는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연휴가 길게 생기면 각종 농기계를 정비하거나 그 시간을 이용해서 A/S를 맡겨둔다. 경운기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예전이라면 거의 집집마다 경운기가 있었는데 요즘은 농촌의 길이 잘 닦여 있어서 1톤 트럭으로 편하게 지나다닌다고 한다. 비가 조금만 오면 진흙밭이 되어 버리는 농촌의 길은 정갈한 시멘트길이나 아예 아스팔트로 바뀌어 있었다. 또한 경운기를 몰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고령의 농촌 사람들이 운행하기에도 1톤 트럭이 훨씬 더 편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상보다는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기계들이 농촌의 수확을 확 바꾼 것이다.

차례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이 차례가 아니라 기계의 혜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농촌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읍내에 제수용 음식을 사러 나가기도 귀찮고 올라간 물가에 발 맞추기도 버겁다. 타지에 나간 자식들을 뻔히 보이는 교통지옥에 가둬두기도 싫다. 당장 우리 시골부터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집이 ‘아예’ 없다고 한다. 보수적인 아버지가 바뀐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끼리 이야기를 나눈 결과로는 추석 연휴 중에 딱 하루만이라도 보자는 것이었다. 좋은 식당을 예약하고 가족들끼리 맛있는 음식을 편하게 먹는 것이다. 그 누구도 제수용 음식을 사느라 시장을 누비거나 인터넷을 뒤질 필요가 없고, 허례허식 가득한 병풍 앞에서 절을 할 필요도 없다. 차례 준비를 누가 얼마나 더 했는지, 먼저 왔는지 늦게 왔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평상시 잘 먹지 않던 음식을 차롓상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맛있는 특식인 것 마냥 먹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도 밥을 다 먹고 과일도 먹고 커피를 마시고도 누구 하나 먼저 일어나서 ‘가보겠습니다’를 외치기 쉽지 않은 묘한 감정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 얼마나 행복한가.

아버지가 외동인지라 내겐 삼촌과 사촌이 없다. 가장 가까운 친척이 5촌이다. 5촌들은 3남매고 5촌 아재들의 자녀들은 내겐 6촌 조카다. 5촌과도 분명 친척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다른 가족이기도 하다. 따라서 추석 연휴 하루만 보자는 말도 시간이 지나면 5촌들간의 저녁 식사 자리로 바뀌고 우리도 우리 가족끼리만 보게 될 것이다. 그마저도 서로 여행을 간다면 더 분화될 것이다.

추석의 다음 차례는 무엇일까? 오랜만에 가족과 만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방전이 된 직장인들이 풀충전을 꿈꾸는 완충 연휴가 될 수도 있다. 2021년 기준 한국의 연간 노동 시간은 1910시간이다. OECD 36개국 중 4번째로 많다고 하니 추석이 대국민 휴식 시간이자 합법적 여행의 시간이 되어줄 수 있다. 어떤 이유로도 쉽게 사라질 수 없는 추석 연휴와 차례를 지내지 않아도 되는 추석의 모습이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오창석 ▲작가 ▲대중문화칼럼니스트

정리: 이선명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Copyright © 스포츠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