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법정] 도둑 맞은 모나리자
용의선상에 피카소 오르기도
진범인 이탈리아인 공사 인부
고국선 문화재탈환 영웅 대우
1911년 8월 22일, '모나리자'가 사라졌다. 벽이 휑했다. 액자와 유리 케이스만 층계참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파리가 발칵 뒤집혔다.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것은 놀랍게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파블로 피카소였다. 이 젊은 예술가들은 어쩌다 '모나리자' 절도 사건에 연루됐을까.
벨 에포크 시절(아름다운 시대라는 뜻,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20세기 초의 기간), 파리 몽마르트르에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피카소와 아폴리네르 역시 서로 예술적 영향을 주고받던 막역한 사이였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의 새로운 시도를 옹호했다. 피카소의 새로운 예술 사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큐비즘 화가'라는 저서도 펴냈다.
피카소가 큐비즘 시대를 여는 데에는 고대 이베리아 석상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을 보라. 사실적 묘사는 사라지고, 흡사 고대 이베리아 석상 같은 모습이다. 피카소는 영감의 원천인 석상들을 보기 위해 루브르를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이를 아는 아폴리네르의 조수는 '종종' 루브르 지하에서 석상을 훔쳐다가 피카소에게 건네곤 했다. 이때만 해도 루브르의 유물 관리나 경비도 허술했고, 지하 수장고에서 그 무수한 석상들 한두 개쯤을 갖고 나온다고 해서 티도 안 났던 모양이다.
이들이 절도범으로 지목된 것은 이 조수의 진술 때문이었다. 그는 '모나리자'의 절도범으로 몰릴까 두려운 나머지 석상을 여럿 훔친 적이 있다고 자백했다. 아폴리네르와 피카소가 차례로 경찰에 소환됐다.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조사 과정에서 피카소가 아폴리네르를 전혀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파탄이 났다.
그렇다면 '모나리자'를 훔친 진범은 대체 누구일까. 범인은 당시 루브르의 보수 공사에 참여하던 이탈리아 출신 빈첸초 페루자였다. 그가 '모나리자'를 훔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액자를 내리고, 그림을 꺼낸 뒤, 들고나오면 그만이었다.
'모나리자'는 2년 후인 1913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발견되었다. 페루자는 대낮에, 그것도 '우피치 미술관'에서, 당당하게, '모나리자' 가격 협상을 하다가 덜미를 잡혔다. 그는 "다빈치는 이탈리아의 예술가이고, 나는 이탈리아의 문화재를 고국으로 되돌려 보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이탈리아 시민들은 그를 옹호했다.
흥미로운 것은 절도를 사주했던 제3의 인물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애초에 '모나리자'가 도난당했다는 사실만 필요했다. 그는 여섯 점의 '모나리자' 위작을 제작해 도난당한 '모나리자'라며 팔아치웠다. 페루자는 혼자 벌인 일이라는 진술을 굽히지 않아 공범 또는 교사범은 잡히지 않았지만, 어딘가에 또 다른 '모나리자'들이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캐슬린 김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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