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해법' 6개월…'과거 직시'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는 어디에[문지방]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역사문제만을 한일관계의 전부인 것처럼 다루는 게 맞나 싶어요."
한 한일관계 전문가의 발언
제3자 변제안을 골자로 한 일제 강제동원 해법이 발표된 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오는 8일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알려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25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죠. 이날 한일 대통령실과 총리실에서는 선언의 의미를 되새기는 취지의 메시지를 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한일관계의 가장 큰 현안으로 자리해 온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 발표 이후 일본의 호응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개인적 유감 표명 △윤석열 대통령과 히로시마 조선인 위령비 공동참배가 전부입니다.
미래청년기금은 강제동원 해법 발표 직후 모인 기부금 외에 추가된 것이 없죠. 반면 북핵 대응과 경제안보, 한미일 다자협력 차원에서 한일관계는 끈끈합니다. 한 한일관계 전문가가 한 말처럼, 이제 양자 외교현안 초점을 역사가 아닌 안보나 문화에서의 협력분야에 두는 것이 양국을 위한 '건강한 길'일까요?
한국 여론 반발 초래하는 '일본의 마이웨이'
일단 정부가 추구하는 한일관계는 '역사 문제'를 핵심 의제가 아닌 부수적 의제로 두는 모습입니다. 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강제동원 해법 발표 이후 한일 정부 차원에서 '과거사 인식 개선방안'을 핵심 의제로 한 협의채널은 없습니다. 민감한 역사문제는 뒤로하고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분야에서 협력을 도모하는 건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형성된 전형적인 대일외교 접근입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과거사 피해자들을 '내버려 둔 채(置き去りにする)' 역사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반복하고 있어 한국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본 정부의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부정 △군함도 관련 조선인 차별 부정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등이 있죠.
이러한 움직임 때문에 우리 국민은 일본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국 간 친밀도가 아무리 높아져도 양국 군사협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이나 준동맹 수준의 제도 정비를 하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한국 기자들은 지난달 14일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세종연구소일본센터 주최로 열린 '2023 한일 언론포럼'에서 이 같은 일본의 '마이웨이'에 대한 우려를 전했습니다. 한 한국 발제자는 "외교의 세계는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데, 일본은 현재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를 언제까지 한국 여론, 국민 감정이 참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꼬집었습니다.
'잃어버린 30년'과 한국의 경제 성장, 그리고 수평적 한일관계
포럼에 참석한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일본의 '마이웨이'에 대해 "일본이 여유가 없어졌다는 생각을 했다"며 "과거 한일관계는 수직관계 같은 면이 있었는데, 지금은 수평적인 관계가 됐다. 국가의 관계성이 바뀌는 과정에서 과거에 했던 것을 이제 안 하려는 정치가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한일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그리고 한국 경제성장과 맞물려 있습니다.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통절한 반성'을 담은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된 직후, 일본 극우단체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를 필두로 한 자민당 내 소장파들은 각각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과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을 만들었죠.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비주류 움직임에 불과했습니다.
자민당 내 극우파벌이 지지층을 등에 업고 성장한 건 2010년대. NHK 홍백가합전에 케이팝(K-POP) 가수들이 대거 캐스팅되고, 한국 반도체 산업이 크게 성장하는 사이 일본은 물가상승을 못해 무기력에 빠진 '사토리 세대'가 등장하던 때입니다. 한국 대중이 일본사회를 보며 느끼는 매력도 이때 급격하게 감소했죠. 그럼에도 한일 정부 관계는 우리 정부가 상황에 따라 일본 측에 △산업발전 모델 제언 및 지원 △과거사에 대한 보상 △민간교류 지원을 요구하는 구조였습니다.
이때 "더 이상 한국에 보상하면 안 된다"며 인터넷에서 혐한 감정을 부추기는 이른바 '넷 우익'과 결합해 길거리 시위에 나선 '재특회'가 등장했습니다. 박철희 국립외교원장은 과거 자신의 논문에서 이 시기 한국 내 반일적 시민단체의 공세와 일본 내 신보수주의의 성장으로 과거사 갈등이 증폭했다고 분석했습니다. 한일 경제산업 변화와 정치 세대 교체에 맞물려 화해와 협력 지점이 좁아졌다는 겁니다.
한국은 쾌속정, 일본은 항공모함…건강한 한일관계 구축을 위한 장기플랜 구축을
하지만 국가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역사문제를 두고 회피를 반복하면 일본이 우려하는 한국의 '정권교체에 따른 입장 번복'은 반복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강제동원 해법은 피해자가 생존해 있고, 대법원 판결까지 나온 사안입니다. 당사자는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친 데다 특히 인권과 연관된 사안인지라 단순히 '과거사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은 쾌속정이고 일본은 항공모함 같다."
도쿄특파원을 오래 지낸 한 기자는 한일언론포럼에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한국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잘 변화하는 반면, 일본은 지나치게 변화하지 않는 대신 한 번 방향을 정하면 꾸준히 나아간다는 것이죠. 이는 한국과 일본 모두 귀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일 양국이 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면 똑같은 얘기만 반복될 뿐이죠. 그래서 국내 일본 전문가들은 '일본이 노력한 부분은 그대로 인정하되, 자민당 내부 인식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킬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일본도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작업을 지속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양자관계는 '과거를 직시한 미래지향적 관계'니까요.
포럼에 참석한 한 일본 측 인사는 한국의 힘이 세졌지만, 일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면서 한일 양국이 양자 관계 변화에 따라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관계를 구축해 나갈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양국 관계 구도 변화에 따라 고질적인 역사문제를 포함한 협력 방향을 어떻게 할지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점진적으로 협의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한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지속가능한 한일관계를 위한 언론의 역할은
언론도 할 일이 많습니다. 20년간 한일 언론교류 활성화에 힘써 온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감정몰이'를 경계했습니다. 진 센터장은 "과거 한국 언론은 일본 하면 '제국주의 망령'이라고, 일본 언론은 한국 하면 '감정적이다'라고 감정을 부추기는 기사를 쓴 경향이 있다"며 "하지만 이제 그런 기사들은 많이 없어졌지만, 언론으로서 다양한 형태의 역사적 사건을 여러 가지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 가지 사례가 떠오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면서 한국 언론은 무라야마 담화 후속작업으로 조성된 '아시아 여성기금'으로부터 위로금을 받은 일부 무궁화자매회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기금 수령이 이뤄져선 안 된다"는 시민단체의 목소리만 담았죠. 고 심미자 할머니와 32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세계평화무궁화회를 조직해 성명을 냈을 때도 보도는 없었습니다.
한국 언론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의 다면성과 복잡성을 충분히 보도하지 못했죠. 이는 위안부 문제 공론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일본회의'의 전신, 새역모가 반한감정을 부추기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일본 기자는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재검토 때처럼 한국 정부가 언제 또다시 약속을 깰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언론보도를 추적해보면 위안부 합의 재검토의 빌미를 제공한 건 다름 아닌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였습니다. 아베 1기 내각 당시 갑작스럽게 '고노담화' 재검토를 위한 검증 작업을 진행했죠.
검증 기간 동안 한국은 일본 정계가 가해의 역사를 지우기 시작했다고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이 검증과정에 아이디어를 얻은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 재검토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검증작업에 들어가죠. 고노담화 검증과정은 일본 언론에 모두 보도됐지만, 한국 내 일본 보수주의에 대한 반작용이 발생했다는 분석 보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면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적극 옹호하며 주장에 가까운 일부 매체들의 보도가 눈에 띄면서 한국 내 일본 반감이 깊어졌습니다.
갈등보단 협력이 나은 한일관계, '과거 직시' 전제 조건 성립해야
한일관계 갈등보단 협력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건 모두가 공감할 것입니다. 문제는 방향과 방법입니다. '역사 현안은 뒤로하고 당장 협력할 수 있는 사안에서 미래지향적 관계'를 도모하는 접근 방법은 벌써부터 우리로 하여금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잊게 합니다. 당장 법원 절차가 끝난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정권을 불문하고 한일 협력을 지속할 수 있는 체계는 기본적으로 서로가 상대방의 시선에서 신뢰를 할 수 있는 정책 방향성을 유지해야 마련됩니다. 그동안 일본은 정권에 따른 정책변화를, 한국은 일본의 역사부정을 문제 삼아 왔습니다. 이 두 가지 과제를 어떻게 풀지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지속할 수 있어야 뒤집어질 수 없는 한일관계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 기초적인 사실을 우리 모두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을 위한 진전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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