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두려워하지 않은 검찰이 치를 대가 [노원명 에세이]
-허먼 멜빌, 『모비딕』중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자신에게 꼬부기 스티커를 선물한 초등학생에게 감사 편지 한통과 함께 커서 읽어보라며 ‘모비딕’ 한 권을 선물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한 장관은 ‘모비딕’을 어지간히 감명깊게 읽은 모양이다. 한 장관에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검찰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구속 일보 직전에 놓치는 것을 보고 소설 ‘모비딕’이 생각났다. 한 장관은 고래에 미친 선장 에이허브인가, 냉철하고 유능하지만 에이허브와 공동 운명으로 엮인 일등항해사 스타벅인가.
‘이재명 사건’의 독자로서 나는 법원이 영장을 부결시킨 것을 좋은 ‘소설적 장치’라고 생각한다. 고래는 처음부터 잡히지 않도록 설정된 존재이고 ‘모비딕’의 주인공은 고래가 아니다. 소설은 내 편이 아닌 운명을 상대로 기투(企投)하는 비극적 사나이들의 서사다. 그것은 성취나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죽음으로만 완성될 주제다. 그러나 정신 차리자.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소설이 아니라 신문 기사다. 검찰 기사가, 그리고 신문의 정치면이 소설처럼 흥미진진한 사회는 위험하다. 무슨 기사가 이렇게 소설적인가.
올해 2월27일 이재명 대표에 대한 1차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때 검찰이 뱃머리를 돌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경선은 배에 있는 통을 고래기름으로 가득 채워 귀선할 의무가 있다. 모비딕은 거대한 고래여서 그걸 잡으면 한번에 통을 채울수 있지만 동시에 배에 싣기 어려울 만큼 크고 난폭해 자칫 배가 난파될 위험이 있다. 운명을 걸어야 한다. 포경선에 출자한 사람이라면 모비딕을 잡는데 무조건 반대할 것이다. 통을 모비딕의 기름으로 채우면 어떻고 다른 고래의 것이면 또 어떤가.
그러나 선장과 그를 따르는 고래잡이들에게 모비딕은 그저 큰 고래가 아니다. 모비딕은 그들을 도발하고 희롱하고 직업적 자존심을 시험하는 존재다. 잊을만하면 거대한 물줄기를 내뿜으며 ‘이리 오라, 이리 오라’ 약 올린다. 손에 닿을듯 말듯하다 거의 따라잡았다 싶었을때 천둥처럼 용솟음친다. 배가 기울고 사상자가 속출한다. 희생과 고난이 거듭될수록 남은 자들의 집념에는 광기가 더해진다. 통에 기름을 채우는 일 따위는 잊어버렸다. ‘저 괴물을 잡고 말리라. 아니면 내가 죽으리.’ 그들은 헛것을 보듯 모비딕에 매몰된다.
검찰이 자존심에 가해질 타격을 최소화하고 빠져나올수 있는 기회는 여러번 있었다. 1차 체포동의안 부결이 그랬고 2차 체포동의안을 꼭 제출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1차 부결로 ‘방탄’ 비판에 몰린 이재명 대표와 그의 당이 ‘2차 방탄’을 하느냐 마느냐로 자중지란에 휩싸이고 식언을 여러번 할때 검찰 스스로 ‘연민의 정을 느낀다. 법정에서 구속시키겠다’고 선수 치고 나왔으면 깔끔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스마트하게, 이성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에이허브 선장과 그의 선원들이 그러했듯 검찰은 검찰의 논리로 움직인다. 에이허브에겐 통에 기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모비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검찰에겐 대장동과 백현동이 아니라 이재명이 중요하다. 에이허브 마음속엔 출항때부터 모비딕밖에 없었고 검찰은 이재명 때문에 이 수사를 시작했다. 그를 구속시키지 않으면 실패한 수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에이허브 선장은 소설 주인공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인물이다. 비극의 아우라를 마구마구 뿜어낸다. 그러나 좋은 선장은 아니다. 모비딕이라는 비현실적 목표에 한눈 팔다 배와 선원을 다 잃고 본인도 죽는다. 검찰은 말할 것이다. ‘나쁜 짓을 했으니 구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상대가 세다고 봐 주나. 그것은 검찰이 하는 일이 아니다. 정치다.’ 이 말을 원론적으로 반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원론적인 검찰이 항상 좋은 검찰은 아니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구속영장발부율은 81.3%였다. 2015년 이후 80% 초반에서 거의 변화가 없다. 10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치면 평균 8명은 구속된다는 것이니 꽤나 높아 보인다. 그러나 영장발부되는 사건의 절대 다수는 주목받지 않는 사건들이다. 영장이 발부됐다고 해서 당사자 이외 누가 시비걸 가능성이 거의 없다. 주목도가 높은 사건, 특히 정치인 사건은 그렇지 않다. 나라가 들썩들썩하고 재판장의 신원이 다 까발겨진다. 그 재판장이 한 정파에 경도돼 있지 말라는 법도 없다. 사건이 정치적일수록 비법률적 요인에 의해 영장발부가 결정될 가능성도 커진다.
정치인을 상대로 한 영장청구가 위험한 것은 사법부 결정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가능성, 그래서 오히려 사건의 본질을 덮어버릴 가능성 때문이다.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이재명 대표는 무죄 판결이나 받은 듯 당당해졌다. 당내 ‘반명파’는 정리되기 일보 직전이고 ‘이재명 유일체제’가 섰다는 얘기가 나온다. 영장기각으로 이 대표는 괴력의 아이템을 획득한 게이머가 됐다. 당분간은 천하무적일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고 검찰도 조금은 염려했을 법하다. 그러나 검찰은 ‘구속가능성’에 베팅하며 계속 판돈을 키웠다. 그리고 마침내 크게 잃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 이 정권의 ‘데스킹’ 기능을 묻지 않을수 없다. 검찰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은 조직의 관성을 초월하기 어렵다. 머릿속이 좀 복잡해도 일단 칼을 뺐으면 휘둘러야 한다. ‘알아서 빠꾸’는 없는 것이다. 이때 ‘동작 그만’을 외치는 것이 데스킹이다. 위험을 감지하고 보다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을 강구할 책임이 데스크에게는 있다.
과거엔 법무부장관이 검찰의 데스크역할을 했다. 이재명 사건 전개과정에서 한동훈 장관은 데스크보다는 모비딕에 씌인 에이허브 선장처럼 보였다. 어쩌면 일등항해사 스타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에이허브는 외친다. “나는 운명의 부하다. 나는 (운명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그건 소설속 고래 사냥꾼의 자세로는 멋있다. 그러나 현실에는 멋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정권에서 그걸 챙기는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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