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17. 왜구, 그 지긋지긋한 야만

최동열 2023. 10. 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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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倭)의 침입에 대비하는 내용을 담은 삼국사기 기록(신라본기 유례이사금 6년 5월조/국사편찬위원회·옥산서원본)

■고려 중기 이후 조선 초까지 왜구 피해 막심

-고대 삼국시대부터 왜인(倭人) 침입 기사 즐비

왜구(倭寇)처럼 지긋지긋한 존재가 또 있었을까. 우리 역사는 외적의 침입, 즉 외침(外侵)으로 점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변 이민족들의 침략과 이에 맞서는 항전이 그칠 새 없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민초들을 괴롭혔던 전쟁을 꼽으라면 아마도 대몽(蒙)항전이나 임진왜란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13세기에 경기병(輕騎兵) 주력군을 필두로 유라시아 대륙 전역을 가공할 만한 공포 상황으로 몰아넣은 몽골의 경우 고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1231년부터 1259년까지 무려 9차례나 침략을 반복해 온 역사가 있다. 침략과 항전이 반복된 30년 동안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삼별초의 빛나는 항쟁을 끝으로 몽골에 굴복한 뒤에는 왕의 시호 앞에 충렬왕, 충선왕 식으로 ‘충(忠)’ 자를 붙이고, 왕이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 하는 굴욕적인 상황을 감내하기도 한다.

후세의 우리들은 당시 천하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던 ‘인간 병기’, 몽골군에 맞서 고려가 30년 동안이나 굴하지 않았던 것은 세계 역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라며 고려인들의 항전을 높이 평가하지만, 당시 중국과 이슬람 세계는 물론 유럽까지 세계의 거대 제국들이 맥없이 나가떨어진 몽골이라는 거대한 공포와 맞서야 했던 고려 민초들의 고통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컸을 것이다.

그런데 민초의 고통 측면에서는 왜구 또한 그에 못지않다. 아니 오히려 왜구들이 약탈과 침입을 반복했던 기간과 횟수를 놓고 본다면 세계사에서 다른 적수를 찾기 어려울 만큼 집요하고, 지긋지긋한 것 이었다. ‘왜구’는 흔히 몽골의 침략전쟁이 막을 내린 후 13세기 중엽부터 한반도와 중국의 연안지역을 대상으로 약탈을 일삼던 일본 해적으로 이해된다. 물론 대마도 등지를 근거로 한 왜(倭)의 침입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왜인들의 침입 기사가 즐비하다. 신라 남해왕 11년(서기 14년) 조에는 ‘왜인이 병선 100여 척으로 해변의 민가를 노략질하므로 6부의 날랜 병사를 뽑아 막게 하였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왜인들의 침입 정보를 입수하고 신라가 미리 대비책을 세우는 내용도 삼국사기에는 적지 않아 유례왕 6년(289년)에는 ‘여름철 5월에 왜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와 갑옷, 무기를 손질했다’는 대목이 보이고, 더 나아가 실성왕 7년(408년)에는 ‘왜인이 대마도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둔 뒤 (신라를)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왕이 우리가 먼저 정예 군사들을 선발해서 적의 진영을 격파하자고 제안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왜인, 왜구들의 침입과 노략질이 수시로 반복되자 신라가 첩보전을 벌이듯 왜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운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고대 삼국시대부터 왜적들의 침입은 적지 않았지만, 우리가 왜구라고 부르는 것은 주로 고려시대 중기 이후 조선 초까지 우리나라 연안에 출몰했던 해적 떼들에 한정된다. 그것은 그 시대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대상으로 노략질과 살육을 일삼았던 왜구들의 침입이 이전이나 이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피해도 극심했기 때문에 그들을 특정해서 지칭할 필요에 따른 것이다.

원광대 나종우 교수는 논저 ‘한국 중세 대일교섭사 연구(원광대 출판국, 1996년)’에서 1223년-1392년까지 169년간 총 529회의 침략이 있었는데, 특히 1350년부터 40년간은 그 횟수가 495회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또 이영(李領) 한국방송대 교수는 지난 2007년에 발간한 역저 ‘잊혀진 전쟁 왜구(에피스테메 간)’에서 왜구를 △13세기의 왜구(1223-1265년) △경인년 이후 왜구(1350년-1391년) △조선시대 왜구(1392년-1555년) 등 세 시기로 분류, 이 가운데 경인년 이후 약 40년간은 무려 591차례의 침략 기록이 나온다고 밝혔다.

40여 년간 무려 500회나 침입해 왔다면 1년에 평균 12∼13차례에 달하는 횟수다. 살육과 약탈을 거리낌 없이 해대는 야만의 무리가 한해에 한 달에 한 번꼴로 침입해 온다는 일을 한번 상상해 보자. 아마도 바닷가 연안 주민들은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 대마도의 왜인 군영을 정벌하려한 내용을 수록한 삼국사기 기록(신라본기 실성이사금 7년 2월조/국사편찬위원회·옥산서원본)

■야만적 일탈 일삼은 ‘사이코패스’ 무리

-물산이 풍족하지 못한 동해안 피폐 더 심해

왜구들을 흔히 도적떼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상을 따져보면 거의 정규군에 버금가는 규모라고 봐야 한다. 강원대 손승철 교수는 저서 ‘조선통신사, 일본과 通(통)하다(도서출판 동아시아, 2006년)’에서 고려사 기록 등을 토대로 왜구는 적을 때는 몇십 척, 많을 때는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으로 구성돼 있었다고 분석했다. 손 교수는 이 책에서 “일본 도쿄대학교 사료 편찬소에는 후기 왜구가 중국 남쪽 해안을 약탈하는 장면을 그린 ‘왜구도권(倭寇圖卷)’이 남아있는데, 그림에 묘사된 것을 토대로 왜구의 수를 감안해 한 배에 10명 내지 20명이 탔다고 하면, 500척인 경우 적어도 5000명에서 1만 명의 왜구가 몰려왔던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왜구들의 약탈과 살육 공포가 어떠했는지를 보다 실감 나게 알기 위해 손 교수의 책을 더 살펴보면, “왜구가 극심했던 1382년에는 (왜구들이) 서너 살짜리 여자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낸 다음 쌀을 넣고 고사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 먹었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소개하고 있다. 야만의 전쟁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기에 글을 읽으면서도 소름이 돋을 정도다.

더욱이 대마도와 일본 규슈의 하카타(博多) 등지를 거점으로 한 왜구들의 구성원이 주로 일본의 내전 상황에서 일탈한 무사 집단 등이 주축으로 가담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은 요즘 말로 하면 군사력이 정규군에 뒤지지 않으면서도 도덕성을 상실한 ‘사이코패스’ 부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 무자비한 도적떼들이 설치는 불안과 공포의 상황에서 동해안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대개는 그들의 약탈과 살육, 납치가 주로 남·서해안에 집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동해안도 그 피해가 심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나 동해안은 물산이 남·서해안 평야 지대보다 풍족하지 못한 데다 11세기 여진족들의 침략까지 온몸으로 경험했던 곳이기에 왜구들의 침략에 따른 일반 백성들의 피폐상이 상대적으로 더 심했다고도 할 수 있다.

동해안에 대한 왜구의 침략도 주로 경인년(1350년) 이후에 집중된다. 고려사에는 경상 전라 충청 등 주로 삼남지방을 유린하던 왜구들이 1357넌 6월 강릉부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 말로 갈수록 왜구들의 동해안 침입은 더욱 잦아져 우왕 7년(1381년)에는 왜적이 울진, 삼척, 평해, 영해, 영덕 등지에 침입하고 삼척현(三陟縣)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이듬해에도 왜구가 평해, 삼척, 울진, 우계(현재의 강릉 옥계)에 출몰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 해인 1383년에는 강릉과 안변 등지에도 왜적이 재차 침입했다고 하니 거의 연례적으로 왜구의 약탈 피해를 입은 셈이다. 더욱이 이 시기 왜구는 내륙지방인 영월, 홍천까지 진출해 약탈과 살육, 방화를 일삼았다고 하니 그 피해상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 왜구가 평해 울진 삼척 우계 등에 출몰했다는 고려사 기록(우왕 8년 윤2월조/규장각 소장본)

옛 삼척군지는 동국여지승람 기록을 인용, ‘우왕 12년(1386년)에 삼척에 왜구가 크게 성하여 위급했으나 나라에서는 (왜구를 격퇴시킬) 알맞은 인재가 없어 곤란해하므로 남은(南誾)이 삼척 지군사(知郡事)가 되기를 자처해 왜적을 격퇴했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고려말에 이처럼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조정에서는 해안지역 경계를 강화하면서 최영·이성계 등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군사 대응에 나서고, 이들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창왕 원년(1389년)에는 경상수사 박위로 하여금 대마도 정벌을 단행케 해 적선 300척을 불태우고, 고려인 100여 명을 구해오기도 했다. 이어 조선 세종 때(1419년)에도 이종무 장군이 ‘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 불리는 대마도 정벌에 나서기도 했다.

방문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마도는 섬 전체의 90%가 산악지형으로 이뤄져 토지가 척박하다. 식량이나 물자를 외부에서 충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로 인해 역사 이래로 거리상 가장 가까운(부산에서 49㎞) 한반도에 기대어 생존해왔고, 침입과 복종을 반복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일본 학계 등 일각에서는 왜구가 일본인과 중국인, 한국인(고려인) 등으로 구성된 복합·다국적 해적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왜구는 모든 사료를 종합해 볼 때 내전기에 일본 무사 출신들이 주축이 돼 고려와 중국 연안에서 조직적으로 물자를 약탈한 일본 해적떼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왜구를 시작으로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국권 침탈까지 한반도에 결코 잊을 수 없는 크나큰 피해를 입힌 일본은 오늘날 아무리 관계가 개선된다고 해도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수식어를 뗄 수 없으니,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역사의 여정에 발자국을 함부로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최동열 강릉본부장

*참고= 기사에 인용(참고)된 논문과 책, 인터뷰 직함은 논문 발표와 책 발간, 인터뷰 당시의 근무처와 직책을 준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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