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함 자료 3만점…최일 예비역 해군 대령의 '잠수함연구소'
경남 김해시에 잠수함연구소 개소 1년…잠수함 문화 확산 시도
(김해=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경남 김해(金海)시는 지명에 바다가 들어있지만, 바다와 접해 있지 않다.
바다가 없는 김해에, 그것도 아기자기한 카페가 많아 MZ세대, 여성들이 즐겨 찾는 율하카페거리 주택가에 세계 각국 잠수함 자료를 수집해 전시하는 '잠수함연구소'가 있다.
최일(60·해군사관학교 40기) 예비역 해군 대령이 연구소 소장이다.
바다 밑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전략무기로 통하는 잠수함.
최 소장은 우리나라 손꼽히는 잠수함 전문가다.
독일이 건조한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잠수함 '장보고함' 인수선발 요원, 우리나라 조선소가 최초로 건조한 잠수함 '이천함' 음탐관, 214급(손원일급) 잠수함 인수팀장, 214급 1번함 '손원일함' 초대 함장, 잠수함 전대장(잠수함 3척 이상을 지휘하는 보직) 등 1990년대 초부터 20여년 가까이 잠수함 핵심 보직을 두루 경험했다.
잠수함 선진국인 독일에선 연방언어학교, 독일해군 지휘참모대학을 수료했다.
'U보트'로 유명한 2차대전 당시 독일해군 잠수함대를 지휘한 칼 되니츠 제독을 다룬 책까지 쓰거나 잠수함 관련 서적을 번역했다.
우리나라 해군 잠수함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바다, 해군과 별 인연이 없는 김해에 잠수함연구소가 있는 이유는 뭘까.
잠수함사령부, 해군사관학교, 해군교육사령부, 해군군수사령부, 특수전전단(UDT) 등 우리나라 해군 주요 부대가 있는 인근 진해가 입지로 더 어울릴법하다.
잠수함을 포함한 대부분의 군함은 선체를 철(鐵)로 만든다.
지난달 25일 잠수함연구소에서 만난 최 소장은 "가야시대 철기문화를 꽃피운 철의 본고장 김해와 잠수함의 만남"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김해가 해양도시 부산, 방위산업 도시 창원, 해군도시 진해(창원시 진해구), 잠수함을 건조하는 조선소가 있는 거제에 둘러싸인 도시면서 나고 자란 부산과 가까워 우연히 정착했고, 잠수함연구소 개소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그가 보유한 잠수함 관련 자료는 3만점에 이른다.
영어·독일어 등 외국어 잠수함 관련 서적, 세계 각국 잠수함 부대 휘장·배지·부대기, 잠수함 승조원 제복, 사진·CD·아날로그 필름 형태 자료까지 온갖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자료는 어떻게 모았을까.
"제가 버리는 걸 잘 못합니다. 지금도 고등학교 배지를 가지고 있을 정도니…. 해외에 나가 박물관, 서점을 지나칠 때마다 잠수함 관련 자료는 보이는 족족 다 샀어요. 벼룩시장에서도 옛날 책, 사진이 나오면 다 구입하고…."
잠수함연구소를 설립할 정도로 방대한 자료 수집에는 한 독일인 도움이 컸다.
독일은 2차세계대전 때 잠수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U보트 승조원이 4만명이나 됐고, 그중 3만명이 전사한 국가다.
동네마다 누군가 한 명쯤 잠수함을 탔던 사람이 있었을 정도다.
잠수함 전통이 유구하고, 자료가 풍부하면서 잠수함에 관심 있는 일반 시민이 매우 많다.
"독일해군 지휘참모대에 유학 중이던 2000년, 우리나라 해병전우회처럼 현지에 '독일잠수함협회'라는 단체가 있었어요. 우리로 치면 '밀덕'(군사장비 애호가)이나 자기 아버지가 U보트를 탔던 사람, 잠수함을 좋아하는 사람 누구나 가입해 교류하는 단체죠. 저도 그때 인연을 맺었는데 멀리 동양에서 온 군인이지만 '잠수함 패밀리'라면서 환영받았습니다"
최 소장은 여기서 발터(73) 씨를 만났다.
발터 씨는 해군, 더더군다나 잠수함과 별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독일 육군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했고, 직업은 트럭 기사였다.
그러나 오로지 잠수함에 대한 관심 때문에 독일잠수함협회 열혈회원으로 40년간 자료를 모았다.
나이가 들면서 한평생 모은 자료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고민할 때 인수자로 나선 사람이 최 소장이었다.
최 소장은 2021년 5월 자료를 인수한 후 아파트, 친지 창고에 보관하다가 집과 가까운 주택 건물 3∼4층을 임차해 2022년 10월 '잠수함연구소'를 개소했다.
바다를 상징하는 짙은 잠수함연구소 간판 옆에는 태극기와 대한민국 해군기가 나란히 걸려있다.
그는 세계에서 몇 개밖에 없을 정도로 귀한 소장품도 있다고 자랑했다.
세계 1차대전 당시 독일 해군기, 칼 되니츠 제독의 친필, 2차대전 U보트 승조원들이 쓰던 장갑 등등 '잠수함의 나라' 독일에서도 귀한 자료들이 제법 된다.
그는 "일반인이 보기에 쓰레기 같아 보이는 소장품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다 소중하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귀한 자료 중 하나로 바닷물이 담긴 물병 하나를 보여줬다.
1992년 독일에서 건조된 장보고함이 북해에서 처음 잠항했을 때 채취한 바닷물을 담은 병이다.
"계획한 심도(深度·깊이)에 새 잠수함 선체가 잘 버티는지 시험 잠항한 그때 의무장(의무 부사관)이 수심 250m 아래 바닷물을 받아 생수병에 담아놨는데 그걸 잠수함연구소에 기증했어요. 30년 넘은 바닷물이 담긴 유리병이라 팔아도 돈이 안 되겠지만, 우리한테는 굉장한 가치가 있죠."
잠수함연구소는 다음 달 개소 1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해군, 잠수함 동호인 등을 중심으로 알음알음 소문이 나 찾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연구소 운영비용은 외부 기관 강의료 등 모두 최 소장이 충당한다.
그는 "손을 타면 안 되는 귀중한 자료들도 많아 예약제로 운영하고, 자비로 운영을 해야 해 골프처럼 돈이 들어가는 취미도 모두 끊었다"고 말했다.
관람료는 상징적으로 5천원으로 정했지만, 전현직 잠수함 승조원은 무료다.
최 소장은 우리나라도 일반인들이 잠수함을 좋아하는 문화가 만들어질 시점이 됐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잠수함 역사가 짧고 보안이 엄청나 아주 특별한 몇몇 사람들만 잠수함하고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당장 부산, 경남만 해도 해군, 조선소, 연구소, 관련 기업 등 잠수함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그는 "외국만 해도 잠수함과 친근해지면서 유익한 정보를 주는 영화, 소설, 게임 등이 많은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며 "'잠수함은 재밌다'고 느낄만한 문화를 퍼트리고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김해시 지원을 받아 어린 학생들을 초청해 잠수함 강의를 하고, 연구소 견학, 잠수함 모형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최근 시작했다.
잠수함 연구소 바로 옆 율하천에 모형 잠수함을 띄우기도 하면서 잠수함 문화를 주변에 알린다.
sea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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