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원숭이' 보듯 쳐다봤지만, 보란듯이 합판을 들어 올렸다
[박정연 기자(daramji@pressian.com)]
'힘' 좀 써야 한다는 노동 현장, 그곳에도 여자가 있습니다. 웬만한 체력으로는 버티기 힘들다는 노동 현장에서 차별과 배제마저도 이겨낸 이들이죠.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큰 블루칼라 노동 현장에서 살아남은 '기술직 여성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남성중심적 문화가 지배적인 현장에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버텼습니다. 여자 화장실이 없는 현장,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야만 했던 무시와 젠더폭력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술을 터득해 당당하게 '기술직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 나간 이들을 <프레시안>이 만났습니다.
자신이 흘리는 땀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여성들은 건설 현장에서도 공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도면을 그리는 먹매김 노동자, 건물 뼈대를 이어 거푸집을 만드는 형틀 목수, 자동차 제조 공장에서 부품을 염색하는 도장노동자 등 <프레시안>이 만난 블루칼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중력을 거슬러 솟아오른 콘크리트 건물들은 '형틀목수'에 의해 쌓아 올려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먹노동자가 설계 도면을, 철근노동자가 뼈대를 잡으면 그 위에 폼이라 불리는 합판으로 촘촘하게 거푸집을 만들어 올리는 게 형틀목수의 일이다. 그 거푸집 안으로 콘크리트가 타설 되고 양생이 완료되면 한 층의 건물이 우뚝 서게 된다. 형틀목수는 재차 그 위를 딛고 또 다른 기둥과 보를 세우며 층을 쌓아 간다. 그렇게 층들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건물이 완성된다.
<프레시안>은 지난 21일 경기도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형틀목수 기능공으로 6년 째 일하고 있는 신연옥 씨를 만났다. 신 씨는 핀(폼을 고정시킬 때 사용하는 연장)이 들어 있는 못주머니를 차고 망치와 시노(손지레)를 숟가락과 젓가락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15킬로그램이 넘는 폼을 거뜬히 들어 옮겨 그 폼을 허벅지에 대고 2단으로 올려 고정시키기도 했다.
형틀목수로 일하기 전 연옥 씨는 아이들 키우고 돈이 필요할 때는 마트나 물류센터에서 단기간으로 알바하는 "'아줌마'의 삶을 살았다." 공장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언니로부터 건설현장에 '여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설현장에서 여자가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연옥 씨에게 도전할 용기를 주었다. 그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건설기능학교에 들어가 기술을 배웠고 형틀목수 일을 시작하게 됐다.
"2017년 안산에서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만드는 일이 첫 현장이었다. 한 명 빼고는 다 남자들이었고 제가 그런 현장을 처음 가봤으니 당황하고 겁도 나고 그랬다. 처음에는 남자들이 저를 원숭이보듯 했다. 여자가 없는 현장에 들어오니 신기해서 제 사진을 찍는 남자들도 있었다. '니 남편은 뭐하느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저희 팀 현장 반장이 '아줌마가 왜 여기 와 있느나. 집에 가서 설거지하고 그러지 왜 여길 왔느냐'며 깜짝 놀랐다. 식당가면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데 왜 여기 왔느냐고 저를 걱정했다. 저도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여자를 볼 정도로, 여성 형틀목수가 적은 건설현장이었다. 건설노동자의 절대 다수가 남성인 문화에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손 한번 잡자', '방 얻을까' 하는 성희롱 발언도 들어야 했다. 그래도 연옥 씨는 건설노조 소속인 '노조팀'이라 안전하게 일했다고 말했다. 노조에 막연히 부정적인 인상이 강했던 연옥 씨는 일하면서 노조는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싸우는 집단"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조 안에서는 동지라는 생각에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일도 자세하게 가르쳐준다. 한 번은 노조팀 소속이지만 일반팀의 먹차장과 먹줄을 놓은 적이 있는데, 그 차장이 '손 잡고 가자' 거나, '방 얻어 줄까', '방 얻을까' 뭐 이런 얘기도 하고 그랬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때 '저 노조팀인데, 함부로 말씀하시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대응 했다. 이런 성희롱이 발생한 상황을 노조에 공유하니 그 뒤로부터는 그 먹차장과 함께 일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만약 내가 일반팀이었으면 당장 밥줄이 걸려있는데, 그렇게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
자기 몸보다 큰 폼을 옮기는 일이 힘에 부쳐 운 적도 있었지만 힘들다고 안 해버리면 아예 못 한다는 생각에 연옥 씨는 하루 하루를 버텼다. 그러다 보니 일이 몸에 익었다. 스트레스도 덜 받게 됐다. 하지만 그를 따라오는 편견섞인 시선과 여성이라는 압박에 연옥 씨는 더 열심히 일했다.
"출근시간이 7시이지만 저는 4시 30분에 출근해서 2시간 일찍 현장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다. 남자들은 담배피고 쉬는데 저는 그 시간에도 계속 일한다. 남자보다 힘있게 하긴 어려우니 쉬지 않고 일했다. 제 체력의 한계 끝까지 무거운 것을 들기도 했다. 긴 파이프인 동바리를 어깨에 두 개씩 들고 다녔는데, 다른 남자 동료들이 '너가 두 개 들면 우리는 세 개 들어야 하니까 하나만 들어'라고 농담식으로 이야기 하기도 했다. 진짜 악바리로 동바리 두 개를 드는 거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이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고 진심을 다해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무거운 폼도 들어낸 연옥 씨지만 편견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옥 씨는 '악바리'가 됐다. 그는 "원래는 폼을 붙이는 일도 1단 폼 위에 또 폼을 쌓아올려 2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1단만 붙이는 일을 줬다"며 "이렇게 배려만 받다가는 내가 2단을 쌓아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20킬로그램 가까이 하는 폼을 2단으로 쌓기 위해 머리로도 받치고 별짓을 다 해봤지만 너무 위험하고 무거웠다. 그렇게 수백번 시도한 끝에 폼을 앞 허벅지에 받치고 안정적으로 쌓을 수 있게 됐다. 허벅지에는 새파란 멍이 훈장처럼 남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다보니 6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15만5000원이던 첫 일당은 어느새 25만 원으로 올랐다. 양성공에서 준기능공을 거쳐 기능공으로서 숙련공 인정을 받았다. 그는 형틀목수로 일하면서 "새로 태어난 것 같다"고 표현했다. 연옥 씨는 망치와 시노(끝이 굽은 철 막대)를 어루만지며 "일은 저를 당당하게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라며 "어디가서 '나 목수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의 저는 아파서 집에 있는 사람처럼 집안에서 위축되어 있었는데, 일을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게 되고 뭔가 자꾸 하고 싶어졌다. 일을 하면서 제가 새로 태어난 것 같다. 항상 주눅 들어 살다가 스스로 돈을 벌면서 집에서 큰소리도 칠 수 있게 되었다. 또 집안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 신랑이 빨래 해주고, 아이들이 설거지도 하고 집안일도 서로 나눠서 하면서 집안도 평등해졌다. 일하는 제 모습이 너무 좋다. 제가 좀 당당해지는 것 같다.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다. "
예순이 넘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고 밝힌 연옥 씨는 "더 정확하게 도면을 보고 더 배워서 형틀목수팀의 여자 반장이 되어보고 싶다"며 웃어 보였다. 그의 뒤에는 그와 동료들이 세운 거푸집들이 중력을 거슬러 우뚝 서있었다. 아래는 신연옥 씨와 나눈 주요 인터뷰 일문 일답.
프레시안 : 본인과 하는 일을 소개해달라.
신연옥 : 이름은 신연옥. 나이는 51세다. 건설 현장에서 6년째 형틀목수로 일하고 있다. 콘크리트 타설을 위해 유로폼, 알루미늄폼 등을 이용해 거푸집을 만든다. 콘크리트가 타설되면서 터지지 않도록 수평과 수직을 맞춰 견고하게 거푸집을 만든다. 저는 주로 아파트의 지하주차장과 상가를 짓는다.
프레시안 :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하루 보통 얼만큼의 일을 하는 지 알려줄 수 있나.
신연옥 : 보통 오전 7시에 작업을 시작해서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런데 공사 현장 주변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일찍 와서 주차해야 하다 보니 새벽 4시 30분쯤 출발해 미리 도착한다. 차를 근처 공터에 주차해놓고 2시간 정도 잔 뒤 출근한다. 그래서 밤에 활동할 수가 없다. 수면시간이 무조건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작업시간은 8시간 정도다. 폼으로 거푸집을 만드는 공정을 하루종일 한다고 하면 한 40개는 넘게 붙일 것 같다. 그런데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얼만큼의 일을 한다고 딱 잘라 말하긴 어렵다.
프레시안 : 콘크리트를 타설할 공간, 틀을 만든다고 이해된다. 형틀목수가 하는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일의 장단점도 설명해달라.
신연옥 : 주된 업무는 먹(설계도면을 콘크리트 위에 그려둔 선)을 보고 폼이라는 합판을 이용해 콘크리트를 타설할 거푸집을 만드는 일이다. 폼 규격과 거푸집 크기가 딱 맞지 않는 경우 목재를 깎고 조립해 위에 댈 수 있는 추가 거푸집(가와)을 만들기도 한다. 형틀목수는 폼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기둥도 만들고 기둥 사이에 보(하리)도 만들고, 그 보를 받치는 서포트와 슬라브도 설치한다.
형틀목수는 현장에서 기능공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단가가 높다. 여성도 목수 일에 어느 정도 숙련되면 기능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매우 힘들다. 폼을 이용해서 거푸집을 만든다고 했는데, 가벼운 폼 10킬로그램부터 무거운 폼은 20킬로그램이 넘어간다. 크기에 맞는 다양한 폼을 직접 들어 옮겨야 하니 체력적으로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동바리라고 불리는 아주 긴 쇠파이프도 날라야 하는데 힘에 부칠 때도 있다.
프레시안 : 먹반장이 콘크리트 바닥에 설계도를 튕긴 다음 철근이 올라가고 그 다음 형틀목수들이 폼을 이어붙여 거푸집을 만들면, 콘크리트가 타설되는 체계다. 연옥 씨는 형틀목수 기능공이기 때문에 처음 일했던 일당과 지금의 일당의 차이가 크겠다.
신연옥 : 6년 전 15만5000원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25만 원을 받는다. 남자 기능공하고 똑같은 단가를 받고 있다. 2017년 건설기능학교를 졸업하고 건설노조 양성공으로 일하면서 처음 받은 돈이 15만5000원이었다. 준기능공이 되어 18만5000원으로 올랐고, 기능공이 되어서 25만 원을 받게 됐다. 기능공이 될수록 더 많은 일을 하니까 그만큼의 보수를 준다. 건설현장의 다른 일보다 강도가 세다보니 단가도 높다.
프레시안 :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만난 건설현장의 여성 노동자 중 가장 많은 일당을 받고 계신다. 무거운 폼과 동바리를 이고 다니시기도 하더라. 그런 육체적 노동과 또 숙련된 경험이 반영된 일당이라고 생각한다. 형틀목수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신연옥 : 결혼하기 전에는 제약회사를 다녔는데 신랑과 결혼하면서 아이를 갖게 되니 자연스레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트나 물류센터에서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았다. 아이들 키우고 돈이 필요할 때는 알바하는 '아줌마'의 삶을 살았다.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다 남편이 목수인 언니를 만났다. 그 분이 거기도(건설현장) 여자가 있다는 얘기를 해줬다. 알고보니 그 여성이 건설노조에서 일하던 1호 여성 노동자였다. 그 언니 남편을 통해 '건설기능학교'를 알았다. 당시 아르바이트만 하고 고정된 일이 없으니 아이들 대학 등록금 고민이 큰 시기였다. 그래서 그 언니와 함께 건설기능학교에 들어가서 목수일을 배웠다.
프레시안 : 형틀목수를 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신연옥 : 우리 신랑은 '니가 얼만큼 꾸준히 할 수 있겠느냐. 밥하고 청소하다가 너가 목수를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건설노조 조합원이 됐다고 하니까 '빨갱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래서 오기로 더 오래 다닌 것 같다. 제가 6년 동안 일하니까 이제 놀라기도 하고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일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집안일도 하고 목수일도 했는데 이제는 신랑이 집안일을 많이 도와준다. 많이 변했다. 우리 아들은 직장생활을 하니까 '엄마 힘들면 그만둬'라고 하는데 제가 아직은 못 내려놓겠다. 나이 60 넘을 때까지 일하는 게 소원이다. 여성 건설노동자 1호 언니가 68세에 정년퇴직했는데 올해까지 일했다. 그 언니만큼은 못해도 60 넘어서까지는 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
프레시안 : 연옥 씨처럼 형틀목수 시작하려는 여성이나 청년들은 건설기능학교를 통해서 일을 배우고 시작할 수 있나.
신연옥 : 그렇다. 기능학교를 통해서 일을 배울 수 있다. 기능학교는 내국인들을 위한 곳이라 학교를 통해 기능을 배우면 현장에 투입될 수 있다.
프레시안 : 형틀목수팀에 여성 노동자 수는 얼마나 되는가. 비율이 궁금하다.
신연옥 : 보통 15명~20명이 한 팀을 이루는데 여성 노동자는 1명이다. 팀마다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니라 몇몇 팀에만 여성 목수가 있다. 그렇게 많지 않지만 있긴 있다. 하지만 여성 관리직은 한 명도 없다.
프레시안 : 건설노동자들의 화장실 수가 적은 것이 건설현장의 고질적인 문제인데, 여성화장실은 충분하게 있나.
신연옥 : 현장마다 다르지만 여기는 그래도 화장실이 두 개 있다. 멀어서 그렇지 부족하지는 않다. 현장에서 화장실이 멀리 있기 때문에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가고 일과 중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지 않고 참는다. 옛날 어떤 현장에는 더 많은 여성 노동자가 있었는데 여자 화장실이 두 칸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마저도 한 칸은 원청 사무실 노동자들만 쓰겠다고 자물쇠로 잠가두어서 한 칸만 사용하느라 불편했다.
프레시안 : 6년동안 일하면서 겪고 보셨는데, 왜 여성이 건설현장에 적다고 생각하나.
신연옥 : 일이 힘들다. 솔직히 일이 힘에 부칠 때가 많다. 처음에는 많이 울기도 했다. 남자들이 던진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어서 집에 간 적도 있다. 그런데 힘들다고 안 해버리면 아예 못 하는 거니까. 그래서 그냥 하루하루 버텼다. 자꾸 하다 보니 일이 몸에 익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덜 받게 됐다. 그러면서 버티게 되더라. 그러다보니 6년 동안 일을 했다.
프레시안 : 한국건설산업연구원 통계에 의하면 건설현장 노동자 열명 중 하나는 여성이라고 한다. 여성 노동자가 앞으로 건설현장에 더 늘어날 수 있을까.
신연옥 : 실제로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건설노조 탄압이 거세지니까 도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다. 건설노조를 쓰려고 하는 현장이 없다. 그러다보니 남자들도 놀아서 일반팀(비조합원으로 구성된 건설 노동자들팀)으로 가는데, 여자가 갈 곳은 더욱 없다. 저는 정말 운 좋게 일할 수 있는 현장이 있다. 저도 이 현장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모여 일하는 노조팀과 비조합원들이 모여 일하는 일반팀의 노동 분위기가 다르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여성 노동자가 일반팀에 소속되어 일할 수도 있지 않나.
신연옥 : 그렇다. 그렇지만 노조팀이 여자가 일하기에는 더 안전하다. 밖(일반팀)에서 일하면 남자들이 짓궂게 굴고 성희롱한다. 그런데 노조 안에서는 동지라는 생각에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일도 자세하게 가르쳐준다. 한 번은 노조팀 소속이지만 일반팀의 먹차장과 먹줄을 놓은 적이 있는데, 그 차장이 '손 잡고 가자', '방 얻을까' 뭐 이런 얘기를 했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때 '저 노조팀인데, 함부로 말씀하시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대응했다. 이런 성희롱이 발생한 상황을 노조에 공유하니 그 뒤로부터는 그 먹차장과 함께 일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만약 내가 일반팀이었으면 당장 밥줄이 걸려있는데, 그렇게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저는 사실 건설현장에 와서 노조를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다. 노조에 막연히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다. 티비에서 보는 싸우는 사람들이 노조라고 생각했다. 신문에서 민주노총은 '귀족노조'라고 하는데 괜찮은 건가 생각했다. 기능학교를 졸업하고 일하기 위해 노조에 가입한 건데, 처음에는 건설노조도 이상한 곳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런데 안에 와서 보니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싸우는 집단이었다. 저는 회사 다닐 때 힘들고 부당해도 참고 다니는 스타일이었는데, 건설노조로 일하면서 내가 부당한 상황을 이야기하면 들어주는 곳이 있다는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프레시안 :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조'를 '건폭'이라는 프레임으로 탄압하고 있는데.
신연옥 : 억울하다. 우리는 건폭이 아니다. 우리는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이야기할 뿐인데, '건폭'이라고 이름 붙여서 압박하니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현장에서도 조용히 일만하라는 식이다. 분하고 속상하다. 사측에 화장실이 없다는 요구를 해도 그것이 노조의 요구이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는다. 탈의실이 없어서 땀과 먼지에 절은 채로 아침에 출근한 옷을 입고 퇴근하고, 휴게실이 없어서 차에서 쉰다. 건설노조를 쓰려는 현장이 없다. 그러다보니 건설노조 소속의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 놀고 있다. 일 할 곳이 없다. 여성만 아니라 남성도 놀고 있다. 그나마 남성은 일반팀이라도 가는데, 여성은 알고 있는 팀장이 데려가지 않으면 일반팀에서 일하기 쉽지 않다.
프레시안 : 남성이 절대다수인 상황에서 적응하는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 현장에서 일했던 날을 기억하나.
신연옥 : 2017년 안산에서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만드는 일이 첫 현장이었다. 한 명 빼고는 다 남자들이었고 제가 그런 현장을 처음 가봤으니 당황하고 겁도 났다. 처음에는 남자들이 저를 원숭이보듯 했다. 여자가 없는 현장에 들어오니 신기해서 사진을 찍는 남자들도 있었다. '니 남편은 뭐하느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저희 팀 현장 반장님이 '아줌마가 왜 여기 와있느냐. 집에 가서 설거지하지 왜 여길 왔느냐'며 깜짝 놀랐다. 식당가면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데 왜 위험한 여기 왔느냐고 저를 걱정한 거였다. 저도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첫 현장에서 만난 그 반장님한테 혼나며 일을 배웠다. 반장님은 멀리서도 망치질 소리만 듣고 절 찾아와 그렇게 치면 손 다친다고 기초를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알려주었다. 그렇게 하면 어디가서도 못 버틴다면서 겁을 많이 줬지만 조언도 해준덕에 제가 일하면서 다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처음엔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그랬는데 이제는 세월이 약이 되었다.
프레시안 : 첫 현장의 반장님은 걱정하는 마음에 '설거지하지 왜 왔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시선은 형틀목수로서의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신연옥 : 슬라브공사라고 1층에서는 천장인데 위에서는 바닥인, 사람이 딛고 서는 판을 까는 일이 쉽지 않은 일로 꼽힌다. 보에 올라서 슬라브를 깔아야 하는데 현장에서는 그 일을 제게는 안 주려고 한다. 저도 슬라브 까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많이 해보고 싶은데 '배려'로 인해서 배제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 일이 힘들더라도 분명히 올라가서 일하고 싶다. 그래야 내 기술이 얼마나 늘었는지 일하면서 느낄 수 있다. 기회를 주면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런 일은 시켜주지 않으니까 서운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계속 해보면 된다. 원래는 폼을 붙이는 일에서도 차별 받았다. 1단 폼 위에 또 폼을 쌓아올려 2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예전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내게 1단만 붙이는 일을 줬다. 이렇게 배려만 받다가는 2단을 쌓아보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단에 폼을 그냥 쌓아봤다. 20킬로그램 가까이 하는 폼을 1단 폼 위에 쌓으려고 올려 봤는데 폼의 무게 때문에 올라가질 않았다. 머리로도 받치고 별짓을 다 해봤는데 너무 위험했다. 그러다가 앞 허벅지에 받치고 올렸더니 무거웠지만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저녁 앞 허벅지가 새파랗게 멍으로 물 들었더라. 그래도 한 번 감을 잡으니까 이제는 2단 폼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프레시안 : 20킬로그램 가까이 되는 폼을 옮기려면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 것 같다. 일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신연옥 : 혼자 일하는 것이 힘들다. 저는 여자라서 파트너가 없이 혼자 일한다. 일할 때 같이 의논할 사람이 없는 게 가장 힘들다. 남자 형틀목수들은 둘이 짝을 이뤄 일을 한다. 한 사람은 자재를 올려주거나 받쳐주고 한 사람은 작업하는 식이다. 타일에 핀을 끼어 고정하는데 그 일도 혼자 하기 때문에 힘들다. 2인 1조로 하는 일 중에 위험한 일이 많은데 결국 나는 그런 일에 투입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눈치를 보게 된다. 어려운 일도 해보고 싶지만 그런 경험을 쌓을 기회가 적다.
프레시안 : 여자를 배려한다는 동료들의 '선의'에도 계속 어려운 일에 도전해서 더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이해된다. 여성이 적다보니 연옥 씨가 하는 작은 실수들도 '여자의 실수'가 되어서 연옥 씨에게 압박처럼 다가왔을 수도 있겠다. 그런 압박과 혹은 여성을 향한 편견 섞인 시선에 어떻게 대응했나.
신연옥 : 더 열심히 일했다. 출근시간이 7시이지만 저는 4시 30분에 출근해서 2시간 일찍 현장 근처에서 대기한다. 남자들은 담배를 피고 쉬기도 하는데 나는 그 시간에도 계속 일한다. 남자보다 힘있게 하긴 어려우니 쉬지 않고 일했다. 내 체력의 한계까지 무거운 것을 들기도 했다. 긴 파이프인 동바리를 어깨에 두 개씩 들고 다녔는데, 다른 남자 동료들이 '너가 두 개 들면 우리는 세 개 들어야 하니까 하나만 들어'라고 농담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진짜 악바리로 동바리 두 개를 드는 거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이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고 진심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프레시안 : 현장에서 신연옥 씨를 부르는 호칭은 뭔가.
신연옥 : 노조팀에서는 저를 동지라고 부른다. 가끔 여사님이나 목수님이라고 부르는 분들도 있고, 젊은 애들은 누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줌마'라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사측에서 저를 '아줌마'나 '여사님'이라고 부를 때는 친한 사람들이 부르는 것과는 다른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반장'이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대체로 남자들이 여자는 자기보다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함부로 부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그런 호칭을 들을 때 바로 지적해야 다음부터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프레시안 : 연옥 씨가 형틀목수로서 계속 도전하고 일하게 만든 동기는 무엇인가.
신연옥 : 시작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 둘 대학교도 보내고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신랑 혼자 벌이로는 힘들었다. 돈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일을 시작했는데 일이 힘들었다. 그래도 임금이 세니까 놓지 못하면서 하루하루 버텼다. 하다보니 체력적으로는 힘들어도 스트레스는 덜 받고, 노조 소속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일 하니까 오래 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 : 무거운 폼을 번쩍 들고 능숙하게 연장을 다루는 모습이 멋있었다.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신연옥 : 한국에 몇 안 되는 여성 목수다. 처음에 제가 시작할 때는 여성 목수가 열 명도 안됐다. 그러다 여성 목수가 20명, 30명으로 늘어나면서 우리가 대단해지는 느낌이 들고 자부심이 생겼다. 일을 시작하기 전의 저는 아파서 집에 있는 사람처럼 집안에서 위축되어 있는 사람이었는데, 일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게 되고 뭔가 자꾸 하고 싶어졌다. 일하면서 제가 새로 태어난 것 같다. 항상 주눅 들어 살다가 스스로 돈을 벌면서 집에서 큰소리도 칠 수 있게 되었다. 또 집안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 신랑이 빨래해주고, 아이들이 설거지하는 등 집안일도 서로 나눠서 하면서 집안이 더 평등해졌다. 일하는 내 모습이 너무 좋다. 더 당당해지는 것 같다.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다.
프레시안 : 형틀목수가 하는 많은 일 중에 이 일 만큼은 자신있다는 게 있나.
신연옥 : 목재 거푸집을 짜서 문과 창문의 틀을 잘 만든다. 특히 폼으로 떼울 수 없는 빈 공간을 잘 채운다. 나는 디테일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반생을 잘 묶는다. 이걸 잘못 묶으면 굳을 때 밀리는데 이제 손에 익어서 빠르게 잘 하는 일 중에 하나다.
프레시안 : 인터뷰 중에도 망치와 시노를 가져왔다. 망치와 시노는 신연옥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
신연옥 : 저를 현장에서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다. 이 도구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디가서 이만큼의 돈을 벌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었겠나. 내게 자신감을 주는 도구들이다. 어디가서 '나 목수예요' 할 수 있는 힘이 된다.
프레시안 : 일터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이 있나.
신연옥 : 나이 60이 넘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작업 반장도 해보고 싶다. 팀장도 해보고 싶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고, 더 정확하게 도면을 보고 더 배워서 형틀목수팀의 여자 반장이 되어보고 싶다.
프레시안 :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신연옥 :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신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주저앉지 말고 움직여서 뭐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이 위축되지 않고 계속 배웠으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
[박정연 기자(daramj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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