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씨는 끝내 ‘가해자 엄벌’을 볼 수 없게 됐다[사건 그 후]
2개월간 교제했던 인터넷 방송인(BJ)으로부터 지속적인 협박과 사이버 스토킹을 받아온 권나은씨(33)가 결국 지난 19일 세상을 떠났다. 나은씨는 가해자와 2년간 형사소송을 이어오던 중 지난 2월27일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졌다. 이제는 ‘유족’으로 불리게 된 나은씨 가족은 “우리 아이는 사회로부터 버려졌다”라고 했다. 지난 4월 경향신문의 보도로 나은씨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바뀌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검찰총장 “피해자 가족 수긍할 수 있게 최선”
협박·스토킹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A씨가 항소장을 제출한 지 3주 후, 나은씨는 쓰러졌다. 지난 2월27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나은씨는 다음날 새벽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이후 인천의 한 재활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이어갔다.
1심 재판부는 A씨에게 적용된 정보통신망법 이용 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강요미수 등 혐의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벌금형을 초과하는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 등을 고려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A씨에 대한 수사가 이뤄질 당시엔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되지 않아 이에 대한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지난 4월26일 나은씨의 사연을 보도했다. 나은씨가 대기업 홍보팀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은 A씨의 협박과 솜방망이 처벌의 문제점, 일상이 무너진 나은씨 가족의 이야기가 담겼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4260600001
이원석 검찰총장은 보도 다음 날인 4월27일 나은씨 사건을 담당하는 인천지검에 “항소심에서는 적어도 피해자 가족이 수긍할 수 있는 선고가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구체적으로는 나은씨 항소심을 담당하는 인천지검에 1심보다 높은 형량이 선고될 수 있도록 항소심 양형에 필요한 자료를 추가적으로 취합하고 분석할 것을 지시했다. 나은씨를 대신해 가족이나 지인들이 법정에 나와 직접 증언할 수 있도록 이들의 재판 진술권을 폭넓게 보장해줄 것도 당부했다.
나은씨 형사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인은 지난 5월 말 검찰 측의 요청으로 나은씨의 건강 상태와 가족들이 처한 상황 등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했다.
의식불명 203일 만에 하늘로···“아까운 아이”
하지만 나은씨는 소송의 끝을 직접 볼 수 없게 됐다. 나은씨는 지난 19일 오후 1시26분쯤 입원 중이던 재활병원에서 사망했다. 의식불명에 빠진 지 203일째 되는 날이었다. 사망 한 달 전 병원에서 감염된 코로나19의 영향이 컸다고 가족들은 설명했다.
아버지 권영우씨는 “투병 기간 말미엔 가족들과 눈 마주침도 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동공을 굴리기도 하는 등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멀지 않아 의식을 되찾을 수 있겠단 희망을 품던 차에 의료진으로부터 감염된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끝내 이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천 한 장례식장에 마련된 나은씨의 빈소엔 500여명의 추모객이 다녀갔다.
항소심은 사건 접수 7개월이 지나도록 개시되지 않았다. 현재는 가해자 A씨 측과 검사 측 모두 항소 이유서를 법원에 제출한 상태다. A씨의 대리인단 목록에는 5명의 변호사가 이름을 올렸다.
권씨는 세상을 등진 딸을 대신해 소송을 이어갈 예정이다. 성년후견인 신청 절차를 막 끝마쳤지만, 이제는 ‘유족’이 되어 남은 법적 절차를 밟아가게 됐다. 권씨는 “우리 나은이가 정말로 똑똑한 아이였다. 일도 잘하고 남을 헐뜯지도 않았다. 그런 애가 재능 한 번 발휘도 제대로 못 하고 이렇게, 이대로 보내긴 너무 아까운 아이다”라며 울먹였다.
“재판장님, 부디 고진선처하여서 피고에게 실형의 선고를 내려 진심으로 회개하고 반성할 기회와 더불어 다시 사회에 돌아갔을 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제 모든 것을 담아서 부탁드립니다.” 나은씨가 2021년 10월 1심 재판부에 제출한 엄벌탄원서는 이렇게 끝맺음했다.
나은씨가 병상에 누워있던 지난 6월21일, 스토킹 범죄 처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반의사 불벌 조항을 폐지하고 개인정보·위치정보 게시·배포, 온라인 상에서의 피해자 사칭 등을 모두 사이버 스토킹으로 신고·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 법이 있었더라면 나은씨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하지면 현실에서 법은 나은씨를 지키지도, 구하지도, 살리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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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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