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조의 아트홀릭] "3천 개의 건물을 무너뜨린 무용수"

2023. 9. 3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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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정승조 아나운서 ■

순백의 한 무용수. 

자신의 의상처럼 새하얀 무대에 등장한다. 무대에는 건물이 가득하다. 이는 종이 모형의 크고 작은 건물이 가득한 우리네 도심의 모습이다. 

잠시 후 적막을 깨는 음악이 흐른다. 무용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시작한다. 사뿐 사뿐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마치 한마리의 나비같다. 그 어디에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의 춤이다. 하지만 이내 곧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유는 춤을 추는 무용수의 발에 도시의 건물이 처참하게 짓밟히며 무너지기 때문이다. 아름답지만 너무나도 잔혹하게 말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춤과 파괴가 공존하는 퍼포먼스가 또 있을까. 

6분 남짓한 짧은 퍼포먼스 영상이지만, 작품이 전하는 여운은 절때 짧지 않은 'Dance on the city(2023)'. 사실 이 작품은 조각가이자 설치 미술가로 활동 중인 작가 하태범(1974~)이 2011년에 제작한 동일 제목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필자는 그의 작품 'Dance on the city(2023)'를 지난 8월 25일 청주시립미술관 현대미술전 '건축, 미술이 되다'에서 보게 되었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선 'Dance on the city(2023)'의 탄생 계기부터 물었다. 

이에 대해 작가 하태범은 "어렸을 때 살던 동네는 서울 방배동이었는데 당시 그곳엔 작은 하천도 흘렀고 근처 사당동에는 낡은 주택도 많았다"라며 "시간이 흘러 10년 가까이 타국서 지내다가 다시 고국에 돌아와 지내면서 서울의 급격한 변화를 직접 보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Dance on the city, 하태범, 가변설치, 종이, 퍼포먼스, 2023


그러면서 "재개발로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화려하고 아름답게 변해가는 서울을 보며 한편으로는 사라져버린 옛 모습들에 대한 아쉬움이 생기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어떤 아쉬움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개발로 낡은 상가나 허름한 집들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값비싼 고층 빌딩과 아파트로 채워져 일반 서민들의 삶의 터전은 점점 좁아지는 모습"이라고 답했다. 

작가는 이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걸까. 춤을 계속 이어가는 무용수다.

작가 하태범은 "인간은 잔인한 장면이나 폭력을 싫어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이나 장면을 참지 못하고 보려고도 한다"라며 "이런 우리의 심리적인 모습을 무용수의 화려한 춤사위와 발아래 부서지는 종이 건물 모형들을 통해 아름다움과 폭력이 공존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Dance on the city, 하태범, 가변설치, 종이, 퍼포먼스, 2023


그의 이런 관심은 작가의 기록에도 존재한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순간의 장면, 그로부터 겪는 경험을 작품으로 표현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2008년 어느날, 미디어도 우리가 겪는 간접 일상의 순간임을 깨달았고 미디어와 뉴스가 전하는 사건, 사고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WHITE 시리즈였다. 

모든 대상을 하얗게 만드는 'WHITE 시리즈'. 

그는 이에 대해 “감정이 배제된 방관적 시각을 상징하기 위해서 흰색을 선택했다”라고 말했다. 이는 이미지와 의미의 객관화를 위한 작업이었다. 조각 작업도 질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종이로 만들었다. 'Dance on the city'가 본래의 색이 빠진 백색의 종이 모형 건물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Dance on the city, 하태범, 가변설치, 종이, 퍼포먼스, 2023


이를 위한 제작 과정은 그야말로 '반복의 연속'이었다. 

먼저 단순화한 건물 도면을 A4 용지에 출력하고 자르고 접고 붙이기를 거듭했다고 한다. 작가 하태범은 "약 4개월에 걸쳐 7~8명이 모형 5천여 개를 제작했다"라며 "이는 도시 빌딩과 낡은 초가집, 전원 주택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60~70가지의 건물"이라고 밝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름 6m × 6m의 좌대(무대) 위에 총 3천 개 이상의 건물을 채운 것이다. 

무용수를 촬영하기 위한 리허설도 수없이 거쳤다.

전시를 기획한 이혜경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그 이유에 대해 "한번 무용을 촬영하면 다시는 촬영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한번에 끝내기 위해 다수의 리허설을 했다"라고 밝혔다. 

더불어 "무용수, 촬영팀과 아이디어를 모았다"며 "무용의 동선이 음악과 안 맞을 수 있고, 무용수가 작품에 걸려 넘어질 수 있고, 무용이 작품을 밟는 행위이기에 무용수의 안전에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Dance on the city, 하태범, 가변설치, 종이, 퍼포먼스, 2023


그렇게 탄생한 올해의 'Dance on the city'에 담긴 메시지도 물어봤다.

작가 하태범은 "모든 현상에는 양면이 공존한다며 동일한 대상을 두고 상반된 시각과 의견이 대립하기도 한다"라며 "중요한 것은 내가 보는 대상이나 상황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있는지 한가지 면만 보는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한다"라고 설명했다. 

하태범의 'Dance on the city'는 현재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현대미술전 '건축, 미술이 되다'에서 볼 수 있다. 건축과 미술의 관계를 살펴보는 이번 전시에선 작가 하태범을 비롯해 수써니 박(1975~), 폴씨(1972~), 박여주(1982~) 등 15명의 건축가와 조형 예술가들이 잠재된 감각을 깨우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11월 19일까지. 월요일은 휴관. 장소는 청주시립미술관. 

(사진 제공 : 청주시립미술관)

정승조 아나운서 /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방송인으로 CJB청주방송, TBN충북교통방송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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