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은 용불용설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창욱 기자 2023. 9. 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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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로버트 다윈. 과학동아 제공

1809년 영국에서 태어난 찰스 다윈은 진화론을 통해 생물학에 거대한 변혁을 가져왔다. 다윈의 가장 큰 기여는 자연선택의 발견인데 이에 관한 결정적인 단초를 1835년 갈라파고스 군도의 핀치새를 연구하며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윈은 영국으로 돌아온 후 진화론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지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출판을 주저했다. 다윈은 젊은 자연사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독자적으로 진화론에 관한 논문을 작성했음을 알게 된 1858년 서둘러 자신의 이론을 발표한다. 그렇게 1859년에야 ‘종의 기원’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다윈은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라는 진화에 관한 종래의 학설을 부인하고 자연선택에 기초한 새로운 진화론을 주장했다. 이 이야기들은 과연 어디까지 진실일까.

다윈의 의혹 1. 과학동아 제공

● 의혹 1. 진화의 아이디어를 핀치새 연구에서 얻었다?

갈라파고스 군도에 사는 참새목 조류인 핀치는 진화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다윈이 이곳에 사는 다양한 핀치가 원래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한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고 특정 먹이를 먹기에 적합하도록 부리의 모양이 변했다고 생각하며 진화에 대한 발상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군도의 새들은 ‘다윈의 핀치’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다윈은 진화론에 관한 단초를 핀치 연구에서 얻었을까.

생전에 다윈은 스스로 핀치 연구에서 진화론을 떠올렸다고 말한 적이 없다. 1859년에 출판된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비글호 항해 중에 남아메리카를 방문한 것이 자신이 진화론을 생각하게 된 영감의 원천이라고 밝히기는 했지만 핀치는 물론이고 갈라파고스 군도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글에서 다윈은 그가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관찰한 생물 분포가 진화(다윈의 초기 용어로는 ‘종의 변형’)를 확신하게 되는 데 중요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다만 그가 언제부터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수집하고 관찰한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다윈이 가장 분명하게 갈라파고스 군도 방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은 그의 사후 1887년에 출판된 자서전에서였다. 여기서 다윈은 거대한 화석 동물들과 남아메리카 동물들의 지리적 분포, 그리고 갈라파고스 군도의 섬마다 조금씩 다른 동물 종들을 언급하며 이들이 종의 변형에 관한 그의 생각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그가 동료 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자서전과 편지에서 갈라파고스 군도에서의 경험은 다윈이 진화론을 생각하게 된 여러 중요한 계기들 가운데 하나로만 언급됐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핀치새는 다윈이 진화론을 말하며 갈라파고스 군도를 언급했던 그 어떤 글에서도 논의되지 않았다.

사실 핀치새에 관한 이야기는 다윈의 갈라파고스 방문 100주년을 기념하는 1935년 영국과학진흥협회 동물학 부문 발표회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발표회에서 다윈의 핀치새 표본을 연구하던 영국자연사박물관의 조류 학예사 퍼시 로우는 핀치새가 다윈을 진화론으로 이끌었다고 소개했다.

1947년에는 조류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데이비드 랙이 갈라파고스 군도에서의 핀치에 관한 본인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다윈의 핀치’를 출판했는데 이 책이 인기를 끌면서 핀치 연구가 다윈의 이론에 결정적인 영감을 줬던 사례로 알려졌다. 갈라파고스 군도의 핀치새는 다윈이 아니라 다윈에게 영감을 받아 핀치새를 연구하던 조류학자들 덕분에 진화론의 역사에서 중요한 동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갈라파고스 군도에 사는 핀치의 한 종류인 선인장 핀치가 선인장을 먹고 있다(왼쪽). 영국의 저명한 분류학자 존 굴드가 다윈이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채집한 다양한 새 표본을 검토한 연구의 일부분. 그는 이 새가 모두 핀치류이고 특정 먹이를 먹기에 적합하도록 부리의 모양이 변화했다고 발표했다. 굴드의 핀치 연구는 다윈의 진화론에 도움을 줬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다윈은 핀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적이 없다. (오른쪽). 게티이미지뱅크, John Gould(W) 제공
다윈의 의혹 2. 과학동아 제공

● 의혹 2. 진화의 아이디어를 숨긴 겁쟁이었다?

다윈의 여러 별명 가운데 하나는 ‘소심한 다윈씨’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피튀기는 수술실 실습을 견디지 못하고 영국 에든버러대 의학부를 자퇴했으며 종의 기원 출판 이후 벌어진 진화론에 대한 논쟁에도 본인 대신 ‘다윈의 불독’이라 불리던 토머스 헉슬리가 나가곤 했다.

이런 소심한 성격 때문에 다윈은 1838년 말 무렵에 이미 진화론의 핵심에 도달했음에도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두려워해 20년 동안 공개하기를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1858년 동남아시아를 탐사하며 독자적으로 진화론을 발전시킨 자연사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논문이 다윈에게 도착하지 않았다면 종의 기원이 나오기까지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소심한 이미지와 달리 다윈은 그의 진화와 자연선택에 관한 이론을 숨기지 않았고 오랫동안 치밀한 연구를 해왔다. 우선 다윈이 진화와 자연선택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진 것처럼 완전한 비밀은 아니었다.

다윈은 동료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 등 꽤 많은 수의 친구와 동료들에게 자신의 이론에 관해 터놓고 논의했다. 심지어는 다윈이 살던 마을의 교사조차도 그의 진화에 대한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1844년에 출판된 ‘창조의 자연사의 흔적’이 엄청난 인기와 비난을 동시에 모았던 사건은 다윈으로 하여금 진화론을 주장하려면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명성을 보다 확실히 다질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했다. 로버트 체임버스라는 스코틀랜드 작가가 익명으로 출판한 이 책은 생명의 진화를 주장하고 그에 관한 여러 아이디어를 모아놓은 책이었다.

책은 출간 직후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에 대한 불경스러운 저작이라는 논평부터 짜깁기에 불과하다는 여러 비판에 시달렸다.

다윈에게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은 창조의 자연사의 흔적을 쓴 저자가 무신론자일 것이라는 비난보다는, 종의 분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과학적 전문성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이었다.

당시 다윈은 비글호 항해와 남아메리카의 지질학과 관련된 저작들을 출판하면서 지질학자로서의 명성은 어느 정도 얻었지만 종의 분류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자연사학자로서의 역량과 성과를 보여줘야 했다.

다윈은 자연선택과 진화에 대해 집필할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에 앞서 스스로 생물학적 전문성과 경험을 갖출 방안으로 따개비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1846년부터 8년 동안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따개비 종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그 성과는 1851년과 1854년, 도합 1000쪽이 넘는 두꺼운 연구서로 출간됐으며 이후 다윈은 따개비의 해부학, 발생학, 고생물학, 분류학 등 각종 분야에 정통한 자연사학자로 널리 인정받았다.

다윈은 따개비 연구 프로젝트로 얻은 자연사학자의 명성 덕분에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진화론을 더 많은 동료들에게 소개했고, 1854년 9월부터 진화 연구로 본격적으로 복귀했다. 진화론 연구에 필요한 전문성과 명성을 갖추기 위해 따개비 전문가가 된 다윈은 소심하다기보다는 철두철미한 과학자였다.

진화를 설명하는 원리 중 하나인 자연선택설에 따르면 키가 작은 기린은 잎을 따먹지 못해 굶어죽기 때문에 키 큰 기린만 살아남는다. 다른 원리인 용불용설은 키가 작은 기린이 높은 곳의 잎을 따먹으려 노력하면서 목이 길어졌다고 설명한다. 다윈은 알려진 바와 달리 용불용설을 배척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진화론에 용불용설을 통합하려 노력했다. 과학동아 제공

● 의혹3. 다윈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거부했다?

진화론을 주장한 사람은 다윈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윈에 앞서 진화에 관한 이론을 제시한 사람 중 한 명이 프랑스의 생물학자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였다.

오늘날 여러 교과서에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전하고, 그렇지 않은 기관은 퇴화한다는 가설)을 ‘획득형질의 유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다. 용불용설은 흔히 다윈의 자연선택설과 대비되는 학설로 소개되지만 실제로 다윈은 용불용설을 반대하지 않았다.

다윈이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윈이 보기에 라마르크는 진화를 입증하는 실제 사례를 적절히 제시하지 못했고 그가 주장한 진화설 역시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획득형질의 유전은 사실 19세기에 다윈을 포함한 다수의 지식인들이 믿던 꽤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1859년 종의 기원 초판에서 다윈은 집오리가 야생오리에 비해 날개는 짧지만 다리가 더 길고 비행거리는 짧지만 보행거리는 더 길다는 점을 언급했다.

가축이 자주 사용하는 기관이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이 같은 기능이 약화되며, 이런 변화가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고 말한 것이다.

다윈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설명하기 위해 독창적인 유전 이론을 만들기도 했다. 1868년에 출간한 ‘가축 및 재배 식물의 변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체세포가 ‘제뮬’이라고 불리는 유전 입자를 방출하면 이 입자가 생식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범생설을 발전시켰다.

이에 따르면 자주 사용해 발달한 기관의 체세포로부터 나온 제뮬이 생식 과정에서 혼합돼 다음 세대로 전달되면서 획득형질의 유전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1872년에 출판된 종의 기원 제6판은 한발 더 나아가 획득형질의 유전을 진화의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로 언급하기도 했다. 여기서 다윈은 비판자들이 자신의 이론이 진화의 유일한 원인으로 자연선택만 주장하는 것으로 왜곡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다윈이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거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보편적이던 용불용설은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윈은 자신의 자연선택 중심의 진화론에 용불용설을 통합시키기 위해 유전 이론을 고안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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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9월호, [과학사 극장] 다윈은 용물용설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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