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명절, 누군가에겐 외로움”…쪽방촌 가보니[현장에서]

강정의 기자 2023. 9. 29. 17:5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전 벧엘의집 직원들과 쪽방촌 주민 등이 지난달 29일 벧엘의집에서 열린 노래자랑 행사에 참여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강정의 기자
벧엘의집서 쪽방촌 주민·노숙인 위한 행사
무료급식·노래자랑·민속놀이 한마당 등 진행
원용철 목사 “취약계층에게는 외로운 시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명절이겠지만, 쪽방촌 주민들과 노숙인들에게는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는 시기예요. 무료급식소는 물론 인근 식당들도 모두 문을 닫거든요.”

대전 동구 정동 ‘벧엘의집’은 추석 당일이었던 지난달 29일 분주했다. 직원들과 인근 쪽방촌 주민들 10여명이 연신 땀을 닦으며 220인분 도시락을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쪽방촌 주민들에게 나눠줄 도시락이었다.

무료급식이 준비되는 시간 동안 벧엘의집 앞에는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 등 수백여명이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폐지를 줍다가 무료급식 소식을 듣고 온 이들도 있었다. 몸이 불편한 이웃을 대신해 도시락을 받으러 온 경우도 있었다.

대전지역 쪽방촌에 거주하고 있는 한 주민이 지난달 29일 벧엘의집에 마련된 차례상 앞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를 위해 추모를 하고 있다. 강정의 기자

같은 시각 벧엘의집 2층에서는 앞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쪽방촌 주민들과 노숙인들을 위한 추도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모두의 축제! 풍성한 한가위’ 현수막이 걸려 있는 차례상 앞에서 주민들은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벧엘의집에 따르면, 대전역 인근 쪽방촌에는 현재 65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60세 이상의 고령층이다. 1988년 설립된 벧엘의집은 노숙인자활시설인 울안공동체와 무료진료소 ‘희망진료센터’, 쪽방상담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권영준 벧엘의집 목사는 “추석 연휴가 4일에서 6일로 늘면서 취약계층의 끼니를 지원하기 위한 예산도 당초 예상보다 크게 늘었다”며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지원하는 예산은 평년과 비슷하지만 취약계층 도시락 준비 예산은 커져 준비하는 데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벧엘의집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 20여명 중 이날 무료급식과 행사를 위해 나선 이들은 10여명이다. 이들은 명절임에도 고향을 찾지 않고 자발적으로 이날 봉사에 함께 나섰다.

대전 벧엘의집 직원들과 쪽방촌 주민 등이 지난달 29일 벧엘의집에서 주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다. 강정의 기자

권 목사는 “매년 명절 때마다 하고 있는 행사이기 때문에 서로가 책임감을 가지며 돌아가면서 행사를 맡고 있다”라며 “직원들은 명절 연휴에는 연휴 시작 전 또는 끝날 즈음 고향을 찾을 수 밖에 없다”라고 했다.

벧엘의집 한 직원은 “매주 대전역 인근 무료급식소를 찾던 20대 주민 한 분이 몸이 편치 않아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며 “오늘은 대신해 나온 주민에게 도시락을 건넸지만 도시락 물량이 부족할 때는 현장분들이 우선이라 나눠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대전지역 쪽방촌 주민 등이 지난달 29일 벧엘의집에서 열린 민속놀이 한마당 행사에서 윷놀이를 즐기고 있다. 강정의 기자

“여기 둥지를 틀어, 지난날의 아픔은 잊어버려~”

점심시간이 끝난 후 벧엘의집 2층에서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쪽방촌 주민들을 위한 노래자랑이 열렸다. 빨간 리본을 멘 벧엘의집 직원들과 주민들은 흥에 취한 듯 춤을 추기도 했다.

3층에서는 윷놀이와 양궁 등의 민속놀이가 한창이었다. 벧엘의집 울안공동체에 10년째 거주 중인 한상욱 할아버지(89)는 “퇴직 이후 시작한 사업이 실패하면서 이곳에 머물게 됐다”며 “우리 같이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벧엘의집은 마음의 안식처”라고 말했다. 울안공동체에는 현재 노숙인 4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벧엘의집은 매년 명절연휴 때마다 인근 주민들을 위한 행사도 열고 있다. 사회선교센터인 벧엘의집은 매주 대전역 앞에서 1500여명의 취약계층 등에게 무료급식과 함께 건강검진 등의 봉사에 나서고 있다.

대전 벧엘의집 울안공동체에 거주하고 있는 한 주민이 29일 벧엘의집에서 열린 민속놀이 한마당에서 양궁놀이를 즐기고 있다. 강정의 기자

24년째 취약계층을 위한 봉사에 나서고 있는 원용철 벧엘의집 담당목사는 “누군가에게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행복한 연휴일 수도 있겠지만, 쪽방촌 주민들과 노숙인들에게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회의감과 외로움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자 동시에 끼니를 챙길 수 없는 가장 힘든 때”라며 “매일같이 이들의 끼니를 지원해줄 수는 없는 만큼 명절 기간 만이라도 취약계층에게 세 끼를 제공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봉사를 하고 있다”라고 했다.

원 목사는 “벧엘의집을 찾는 주민들 10명 중 9명은 가족과 단절돼 고향을 찾기 어려운 분들”이라며 “이분들의 끼니는 물론, 이들에게 삶의 즐거움과 희망을 주기 위해 매년 행사를 열고 있기도 하다”라고 덧붙였다.

벧엘의집은 지난달 28일부터 3일까지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 등의 식사 3240인분을 제공했다. 지난달 30일에는 대전역 앞에서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건강검진 봉사도 진행했다.

대전지역 쪽방촌 주민 등이 지난달 29일 벧엘의집 앞에서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강정의 기자

강정의 기자 justic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