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에 ‘비겁하다’ 쓴 송중기… ‘화란’, 어른 속 소년을 연기하다 [엄형준의 씬세계]

엄형준 2023. 9. 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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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개런티에 영화의 주인공 아님에도 출연 자처
어두운 역할에 대한 열의… 얼굴의 상처 드러내
“힘이 들어갈 때가 있는데, 절제하느라 힘들어
극 중 ‘치건’은 덜 자란 어른… 그 지점에 흥미”
핵심 장면에 ‘비겁하다’ 메모… 영화 곱씹게 해

송중기가 제 얼굴의 상처를 스스로 드러냈다. 그리고 내면에 감춰진 욕망도 함께 드러난다.

“제가 여기 상처가 있어요. 작품을 할 때 커버한다든가 가리거나 해왔던 거죠. 이번에 처음으로, 오히려 (잘 보이게) 음영 처리를 했어요.”
송중기는 ‘화란’의 장르와 덜 자란 치건의 매력에 끌려 출연을 자처했다. 그는 배우로서의 욕망 분출과 절제 사이를 오가며 치건을 연기한다. 하이지음스튜디오 제공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지난 25일 만난 송중기는 자신의 왼쪽 뺨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오는 10월11일 개봉하는 누아르 영화 ‘화란’에 송중기는 깡패 중간 보스인 ‘치건’ 역으로 나온다.

밝은 햇살에 환한 얼굴이 잘 어울리는 송중기가 이번엔 어둡고 스산한 영화를 택했다. ‘택했다’는 표현이 적확한 건, 본인은 알리려 한 적이 없다지만 이젠 너무 잘 알려진 대로, ‘노게런티'(출연료 없이)로 이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영화에 대한, 그리고 연기에 대한 송중기의 욕망은 컸다.

“치건의 매력에 먼저 끌린 건 아니에요. 대본을 처음 보고 이 장르가 좋았어요. 대본이나 작품을 볼 때, 당시 느끼는 생각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데, 당시엔 색다른 거에 꽂혀있던 시기였고, (이 작품이) 되게 새롭다고 느꼈어요.”

송중기는 ‘어두운’ 연기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고 했다. 출연작 중 누아르 장르의 드라마 ‘빈센조’가 있긴 하지만, 영화는 아니고 화란보다 유머러스하고 느낌이 밝다.
“군대에 가는 바람에 못했던 작품이 있는데, 그게 아쉬웠었고. 화란을 어떤 분들은 오해하시는 게 송중기가 건달 영화를 되게 하고 싶었나 하는데, 이 영화를 건달 영화라고 생각 안 해요. 어두운 스산한 장르의 영화를 계속하고 싶었고, 그 타이밍에 이걸 만난 거죠.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연기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싶은 건 배우로서 송중기의 욕망이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선 나도 모르는 내 안의 나를 끄집어내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캐릭터를 어떤 걸 하고 싶다기보다 다양한 장르를 하고 싶은 욕심이 더 큰 게 있어요. 굳이 비교하자면, 그쪽(장르)이 더 큰 거 같아요.”

장르를 먼저 고민했다지만, 치건의 스타일에도 끌린 듯하다.

“그렇게 보신다면 그게 맞겠죠. 제 안에 그런 게(상남자 스타일) 있을 거니까, 그냥 하고 싶었어요. 나한테 이런 면이 있기 때문에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신인인 김창훈 감독의 40억 예산의 작은 영화였고, 상업적인 영화도 아니었다. 송중기는 돈 안 받아도 출연하고 싶다고 했고, 매니지먼트사도 출연을 막지 않았다. (다만 매니지먼트사는 공동제작사로 참여해, 영화가 흥행할 경우 이익을 볼 순 있다.)

돈을 안 받은 것도 놀랍지만, 그가 가장 비중 있는 역도 아니다. 이 영화는 아직 대부분은 얼굴도 몰랐던, 그렇지만 깊은 내면의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홍사빈이 맡은 ‘연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그에게 이 작품은 ‘절제’의 미덕을 요구했다. 

“저라고 욕심이 왜 없겠어요. 연규 역할이 중심이 돼야 하고… 사빈이가 액션을 하면 리액션만 하자가 목표였어요. (안 그러면) 영화 느낌이 깨지니까. 그런데 저도 본능적으로 배우다 보니 잘하고 싶고 현장에서 힘이 들어갈 때가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절제하느라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송중기의 역할이 작은 건 아니다. 연규에게 있어 치건은 형이고, 조언자다. 그리고 치건에게 있어 연규는 자신의 거울과 같은 존재고,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 주는 존재다. 외면적 주인공은 연규일지 몰라도 더 깊이 주제를 곱씹어 보면, 이 영화는 치건과 연규, 결국 두 사람의 이야기다.

“영화가 아닌 실제 생활에서 아이들을 좋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게 어른의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영화에서) 연규는 자라는 아이고, 치건은 어른인데 연규랑 똑같이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란 생각이에요. 영화가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은 없는데, 그 지점이 재미있었었어요.”

이 영화의 후반부, 송중기는 홍사빈과 함께 영화의 주제가 흠뻑 녹아있는, 예고편에도 나오는 격정적이고 결정적인 장면을 연기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내용을 설명할 순 없지만, 송중기의 대본엔 이 장면에 대해 ‘비겁하다’라고 쓰여있다. 이 장면과 치건이 열심히 만들 던 나무 상자엔 어떤 깊은 의미가 있다. 치건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관객의 몫인데, 영화를 볼 때 그리고 보고 난 후, 며칠이 지난 후 치건의 행동을 다시 곱씹어 보게 된다.
본격 건달 영화도 아닌데, 훔치고 사람 때리는 깡패가 멋있게 나오는 건 부도덕하지만, 카메라에 잡힌 송중기는 이 어두운 영화에서도 결국 잘생기고 멋있게 나온다. 연기자로서 송중기가 가진, 숨길 수 없는 달란트다.

영화의 제목인 ‘화란’은 ‘네덜란드’의 음역어로, 재앙과 난리라는 뜻도 있다. 지옥 같은 현실을 사는 연규에겐 네덜란드가 꼭 가고 싶은 유토피아다. 연규가 결국 화란에 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는 올해 제76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됐고, 치건의 송중기는 처음으로 프랑스 칸의 레드카펫을 밟았다. 칸에 가고픈 욕망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지만, 그에겐 이 영화가 준 기회가 돈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을지 모른다.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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