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용 테이프로 예술 세계 확장한 아티스트 조윤진
2013년 9월 조윤진은 ‘나한테는 테이프밖에 없다. 이걸로만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테이프로 그림을 그린 지 꼭 10년이 된 그는 “창의적인 건 제한을 두는 일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9월 15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난 조윤진은 "유명한 사람을 그리는 이유는 어릴 적 막연히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저는 항상 주목받는 걸 좋아했고, 실제로 어릴 땐 주목을 받았어요. 그땐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미대를 졸업하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게 제 사춘기였죠. 그림마저 그리지 않으면 제가 전혀 의미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 다시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직선으로 만들어내는 구처럼
물감 값, 재료 값을 벌기 위해서 스무 살 때부터 사람을 가르쳤는데 어느 순간 주객전도가 됐죠. 가르치는 일이 동네에서 소문이 나고 사람들이 계속 오니 안주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음악을 전공한 게 아닌데도 음악을 좋아해서 기타 치는 걸 업으로 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친구가 그랬어요. "너는 왜 전공까지 해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고. 뼈를 맞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테이프를 사용했나요.
저는 두께감이 있는 유화를 좋아했어요. 그러면 작품에 물감이 많이 들어가서 제작비가 비싸지죠. 돈을 들여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게 잘 안될 수도 있잖아요. 물감 말고 돈이 안 드는 게 뭐가 있을까. 처음엔 책이나 신문, 잡지 같은 걸로 콜라주를 해보기도 했어요. 그러다 테이프를 생각하게 됐죠. 처음엔 테이프 말고도 다른 재료를 함께 사용하다가 점점 테이프만 쓰게 됐어요.
반응이 바로 왔나요.
당시엔 페이스북이 대세였거든요. 테이프로 그린 그림을 올려봤는데 평소에 1~2개 눌리던 '좋아요’가 30개로 늘어났어요. 그러다 영화 '레옹’의 마틸다를 그린 게 당시 핫한 커뮤니티에 올라갔더라고요. 자고 일어나니 페이스북 '친구요청’이 몇백 명이 와 있고 3000개 씩 좋아요가 달려 있었어요. 이걸 계속해도 되는구나, 싶었죠.
기본적인 스케치 위에 테이프를 계속 덧발라 작품을 완성하시던데 어떻게 색을 구상하나요.
보이는 대로 붙여요. 밝은 색이다 혹은 어두운 색이다 정도의 느낌을 갖고 있죠. 그리고 겹쳐가면서 채도와 명도를 구체화해요.
테이프 커팅을 주로 직선으로 하는데 이유가 있나요.
구를 소묘할 때 수많은 직선을 그려서 곡선을 만들잖아요. 유사한 개념입니다.
물감이나 다름없는 테이프는 어떻게 구하시나요.
박스 테이프만 해도 다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제조 회사마다 투명도와 발색력이 달라요. 새로운 색이 필요하면 해외 직구를 하기도 하고 팬들이나 지인이 테이프를 보내주시기도 해요. 지인들도 어딜 가나 테이프를 보면 제 생각이 나나 봐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붙인 테이프를 다시 떼는 일은 없나요.
웬만하면 그렇진 않은데 먼지가 들어가면 테이프를 제거해야 합니다. 계속 테이프를 겹쳐서 작업하다 보니 먼지가 들어간 부분은 점점 튀어나오거든요. 그러면 나중에 테이프가 떨어질 위험도 있고요. 이제 10년쯤 하다 보니 손날이 아프기 시작해요(웃음). 테이프를 붙일 때 손날에 힘을 줘서 고정해야 하거든요. 한번은 테이프 그림을 체험으로 가르친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테이프를 잘 붙이는 걸 힘들어하더라고요.
못 그리기 위해 잘 그리는 작가
"어떤 풍경을 보면 그걸 색으로 남기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인물이 아닌 걸 그리기도 했죠. 색에 대한 연구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테이프를 이렇게 겹치면 어떤 색이 나오겠다, 생각할 수 있잖아요."
추상 작품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초상을 그리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게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사물이나 풍경에도 초상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떤 대상에 갖는 인상이죠.
그릴 인물은 어떻게 선택하나요.
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그려요. 닮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고, 저랑 닮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레이디 가가 같은 록 스타들이 기억에 남네요. 제가 좀 관종이거든요(웃음).
관심이 그림을 그리는 원동력인가요.
저를 계속 불러주는 기업이 있고 기억해주고 그림을 사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들에게 부채감 같은 게 있어요. 제 작품을 좋아해서 구입하는 분들의 부를 늘리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는(웃음). 그러니까 제가 더 잘해야 하고 작품 만드는 걸 그만두지 않아야 하죠.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가지만 예술가의 작업은 고독한 일입니다.
그래도 작업을 할 때만 저를 마주한다고 느껴요. 사실 평소에 거울을 잘 안 보는 편인데 캔버스를 보면 그게 거울 같아요. 가끔은 힘들어서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많지만 그래도 해야죠(웃음).
쉴 때는 주로 어떻게 보내시나요.
최근엔 개인 작업은 좀 쉬고 있는데 그래도 생각은 계속하고 있어요. 바에 가면 남은 술을 킵해두잖아요. 그것처럼 아이디어를 킵해둬요. 문구를 적어둔다거나 어떤 기분을 기록해두죠.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메모장을 다시 열어봤는데 내가 분명히 쓴 건데도 이걸 내가 쓴 게 맞나 하는 것들도 있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작업할 때 다시 보기도 해요.
되고 싶은 작가의 모습이 있나요.
못 그리기 위해서 잘 그리는 작가들을 좋아해요. 피카소는 해체와 조립으로 잘 알려졌지만 모든 장르를 섭렵한 사람이거든요. 데이비드 호크니도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입니다. 제가 처음 테이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책에서 그가 한 말을 봤어요. "100개의 선을 사용해서 튤립을 그릴 때보다 5개의 선을 사용해 튤립을 그릴 때 더 창의적일 수 있다." 어떤 계시 같았어요. '테이프라는 제약을 두고 계속 작업을 해도 되는구나’ 하는.
스스로 한계를 두는 건가요.
세상에 창의적일 수 있는 방법은 너무 많죠. 하지만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해요. 대학에서 교수님이 어떤 학생에게 그랬어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어떤 제한 속에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린아이 같은 작가로 기억되길
그는 현재 '여성동아’와 협업하고 있다. 조윤진의 자화상은 '여성동아’ 2023년 10월호를 장식했다. 그는 11월 열릴 '여성동아’ 90주년 기념 전시에 출품할 작품도 만들고 있다. 1967년 복간 후 1981년까지의 표지화 중 7점을 재해석하는 일이다. 조윤진은 이 중 5점을 9월 별세한 화백 김형근(1930~2023)의 표지화 재해석에 할애한다.
김형근 작가의 작품을 많이 고른 이유가 있나요.
그림을 보며 미국의 거장, 알렉스 카츠가 떠올랐어요. 왜 지금까지 외국 작가들만 봤을까, 생각했어요. 요즘 말로 '힙하다’고 할까요. 제가 그리고 싶었던 현대적인 화풍이었고 이걸 제 식대로 표현하면 어떨까 해서 김 화백님 작품을 많이 고르게 됐습니다.
표지에 실린 자화상도 인상적입니다.
사진을 전공한 친구가 프로필사진을 찍어줬어요. 테이프 작업을 하면 손에 물감이 묻는 것처럼 테이프 덩어리가 뭉쳐서 군데군데 붙어요. 그 흔적들이 좋아서 내버려두고 있었는데 그걸 칼로 툭툭 잘라서 머리에 붙이고 찍었어요. 그 사진을 보고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길 원하시나요.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멋진 말을 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천진하고 어린아이 같은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멋있는 사람인 것 같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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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홍태식
문영훈 기자 yhmoon9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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