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은 왜 우크라이나 전쟁을 ‘성전’이라고 말했을까

박은하 기자 2023. 9. 29.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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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7일 연해주 아르-1역에서 북한으로 출발하기 전 손을 흔들고 있다./TASS연합뉴스

“김정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성전’ 지지를 약속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 13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을 보도하며 내보낸 제목이다. FT뿐만 아니라 로이터통신, 가디언, CNN 등 영어권 주요 외신들이 김 위원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옹호하면서 ‘성전’이라고 표현했다고 전했다.

이날 생중계 영상을 보면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 전 모두발언과 만찬발언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지만 ‘성전’, ‘성스러운 싸움’, ‘성스러운 투쟁’ 등의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정의의 싸움’, ‘정의의 위업’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외신 기사에 김 위원장이 사용하지 않은 성전이란 표현이 등장한 이유는 뭘까.

성전 등의 표현은 러시아 측의 통역과 러시아 매체에서 나온 것이다. 먼저 김정은 위원장은 이날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만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러시아 군대와 인민이 패권과 팽창 야망을 추구하는 악의 무리를 징벌하고 안정적인 발전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정의의 싸움에서 반드시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리라고 확신한다.” “영웅적인 러시아 군대와 인민이 승리의 전통을 빛나게 계승해서 군사작전과 강국 건설의 두 전선에서 고귀한 존엄과 명예를 힘있게 떨치리라고 굳게 믿는다.”

러시아 타스통신은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We are confident that the Russian army and people will unquestionably win a great victory in the sacred struggle to punish the evil cabal with hegemonic pretensions and that harbors expansionist illusions, and win the struggle to create a stable environment for development.”(러시아 군대와 인민은 패권을 주장하고 팽창주의적 환상을 부채질하는 거대한 악의 처단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안정적인 발전 환경을 창출해내는 성스러운 싸움에서 이길 것을 확신한다.)

대부분 직역에 가깝게 번역됐지만 김 위원장의 발언 가운데 ‘정의의 싸움’은 타스통신에서 ‘성스러운 투쟁(sacred struggle)’으로 표현됐다.

김 위원장은 이날 오전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는 “러시아가 패권주의 세력에 맞서 자기 주권적 권리와 안전,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정의의 위업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측 통역은 김 위원장의 모두발언을 전하면서 ‘정의의 위업’을 성전(священная борьба)이라 통역했다. 타스·스푸트니크통신 등 러시아 영문 매체도 성전(sacred fight)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로이터통신 등 대부분의 서방 외신은 타스통신의 보도를 따랐다. AP통신, 미 NPR 등은 ‘정의로운 싸움’(just fight)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성전이란 종교색 짙은 단어가 선택된 것에는 러시아가 대내 선전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오역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정재원 국민대 러시아·유라시아 학과 교수는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성스럽고 순결한 정교회 민족 러시아’와 ‘기독교 정신을 버리고 동성애를 전파해 인류를 퇴폐와 타락으로 이끄는 서구라는 악마’와의 대결이라는 의미를 늘 강조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김 위원장의) 원 발언에 없는 종교적 표현을 끼워 넣은 이유는 평소 강조하던 대내적 선전을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의도적인 오역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집권 초인 2000년대 초반 ‘친서방’ 지도자로 분류됐지만 세 번째로 집권한 2014년 이후에는 러시아의 전통문화와 민족적 사명을 강조하고 러시아 정교회와 밀착하는 행보를 보였다. 특히 기독교 정신과 러시아 전통적 남성상에 맞지 않는다며 성 소수자를 탄압하는 행보를 보였다. 러시아정교회 수장인 키릴 모스크바 총대주교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을 성전이라고 옹호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수군사작전’이라고 부르지만 ‘성전’이라는 개념을 동원해 ‘신의 사명을 띤 전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 [시스루피플] 우크라이나 침공이 ‘성전’이라는 키릴 모스크바 총대주교
     https://m.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205261725001#c2b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정의의 위업’을 ‘성전’이라고 번역한다면 오역일까. 영문번역가 노승영씨는 “번역된 낱말은 독자의 머릿속과 사회에 확립된 어휘 연결망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사전적 의미만 옮긴다고 해서 옳은 번역이라고 말하긴 어렵다”고 전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정의는 곧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러시아나 영어권에서 정의로운 싸움이 곧 성전이라고 통용된다면 꼭 오역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 정치철학자 박이대승씨는 “‘정의’란 말도 영어 저스티스(justice)의 번역어인데 이를 사용했다면 ‘justice’라고 정확하게 번역해야지 ‘성전’이라고 사용한다면 오역”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크리드(sacred)에는 ‘성스럽다’는 뜻도 있지만 ‘신에게 바쳐진’, ‘희생된’ 등의 뜻도 담겨 있다”며 “정의의 전쟁이 ‘마땅한 전쟁’이 된다면 성전이라고 한다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전쟁’이란 뜻이 담긴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중동 지역 무장단체들이 서방에 대해 일으킨 테러에는 ‘성전(지하드)’이란 표현이 사용됐다. 서방은 이에 맞선다며 테러와의 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정당화했다. 서구 외신에서 러시아 관영매체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해 사용한 ‘성전’이란 표현은 북한의 움직임에 전략적 의미보다 종교적 맹목성부터 읽어낼 여지가 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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