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아아’ 뺏긴다면?…프랑스에선 혁명까지 일어났다는데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3. 9. 28.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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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7월 14일은 프랑스 수도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에서 1년에 한번 뿐인 특별한 행사를 엽니다. 파리 어디에서든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화려하며 오로지 이날 하루만 허가된 행사, 바로 혁명기념일(Bastille Day) 불꽃놀이 입니다.

행사는 1년 중 단 한번 뿐인 에펠탑을 배경으로하는 성대한 불꽃놀이로 유명합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수도 밤하늘을 수놓는 행사답게 그 규모와 화려함으로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죠. 안그래도 비싼 에펠탑 인근 호텔의 이날 저녁 숙박료는 몇 배로 뛰고, 그나마도 최소 1년 전에는 예약해야 한다고 합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우리의 광복절쯤 되는 혁명기념일은 1789년 7월14일부터 1794년 7월28일까지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기리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1880년 7월14일 지정한 기념일입니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자유·박애·평등으로 대변되는 근대 시민혁명의 전형이라고 배운 바로 그 혁명입니다.

비약일 수 있습니다만, 와인은 프랑스 혁명의 태동에 나름대로 일조했습니다. 과거 와인프릭에서 프랑스 혁명 과정 중 와인 오크통(Barrique·바리끄)에서 유래한 단어가 현대의 바리케이드(장애물·Barricade)라는 점을 소개한 적도 있는데요.(관련 기사, 바리케이드 된 나무술통…알고보면 ‘이 맛’내는 비결) 이번엔 프랑스 혁명이 있던 격동의 시기, 와인의 다각적인 역할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23 혁명기념일 불꽃놀이 사진. [출처=sortiraparis.com]
혁명 이전 프랑스의 와인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프랑스 와인 산업은 굉장한 호황을 누렸습니다. 1700년대 초중반, 프랑스는 전 국토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간척 프로젝트를 벌이는데요. 이를 통해 포도 재배에 용이한 토지가 크게 확대됐고, 농업 기술 역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시기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기후조차 알맞게 지속되면서 포도 생산량이 큰 폭으로 늘고, 좋은 결과물을 맺었죠.

좋은 포도는 좋은 와인의 재료입니다. 당연히 프랑스 와인의 질이 향상됐고, 이는 수출 증대로 이어졌습니다. 이 무렵 프랑스 와인이 수출 사상 최고치를 매년 갱신했다는 기록도 존재합니다. 프랑스의 와인 산업은 당시 프랑스를 통치했던 왕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데요. 군주 금고의 수입 상당 부분을 와인이 해결해줬고, 이를 통한 사치가 가능했습니다. 물론 그 사치 때문에 시민 혁명이 촉발되지만요.

또 당시 와인이 크게 대중화되면서 농민부터 귀족까지 모든 국민들이 식사와 와인을 즐기는 시기가 도래합니다.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즐기던 우리가 어느새 식사 후 밥값만한 아메리카노를 사먹듯, 그 당시 프랑스 시민들 역시 식사에 와인을 곁들이는 게 당연해진거죠.

소설 ‘레 미제라블’을 보면 매일 밤 모여 와인을 마시며 혁명을 토론하고 결국엔 행동에 옮기는 아베쎄의 벗들(Les amis de l’ABC)이 나옵니다. 이들은 파리의 청년 노동자 및 대학생 모임인데요. 모임명인 아베쎄(Abaisse)는 ABC를 프랑스어로 발음한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장삼이사’ 정도의 흔한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이들도 매일 밤 와인을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일 정도로 와인은 아주 대중적인 음료였습니다.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아베쎄의 벗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레 미제라블 캡쳐]
혁명을 부른 흉년
그런데 1700년대 후반, 문제가 생깁니다. 당시 와인의 생산과 판매는 왕실이 부여한 복잡한 특권 시스템에 의해 독점됐는데, 유리한 조건과 허가를 받기 쉬운 귀족 등 특권층에 비해, 그렇지 못한 계급의 불만과 좌절이 누적된 것입니다. 이러한 불만이 특권층을 향한 혁명의 불씨 중 한 가지가 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혁명 2년 전인 1787년부터 시작된 흉년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양질의 와인이 부족해지자 당연히 일반 시민들부터 와인을 구하는 게 힘들어졌고, 이미 식사에 와인을 곁들이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진 시민들에게 큰 불만으로 작용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시죠. 정부가 갑자기 아메리카노의 제작·판매·음용을 금지하거나 세금을 붙여 소비자 가격을 몇 배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파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대중의 분노가 들끓기 시작합니다. 분노한 대중들은 수출 상인의 와인 창고는 물론이고 투기꾼이나 사재기상의 와인들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전국적으로 소요 사태가 생겨나게된 것이죠. 물론 와인이 프랑스 혁명의 결정적인 트리거가 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포도만 흉작인 게 아니라, 모든 농작물이 흉작이었던 시기였으니까요.

바스티유를 습격하는 성난 군중들. [출처 Jean-Pierre Houël -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와인, 혁명의 상징이 되다
역사는 혁명이 시작된 날을 성난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1789년 7월14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시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으로 되돌아 가볼까요. 당시 프랑스 군주는 루이16세였습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던(실제 이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입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사치였습니다. 국가 재정이 파탄 상황이 이르렀죠. 루이16세는 계층별 회의인 삼부회를 소집합니다.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 제3신분이 평민이 모여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한 세제 개편을 논의합니다. 당연히 기득권인 왕과 제1·2신분은 같은 의견을 내지만, 머릿수는 제3신분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당시 전체의 96%가 제3신분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득권 계층이 꾀를 냅니다. 머릿수 표결이 아닌 신분별 표결을 주장한 것입니다. 평민들은 당연히 이에 반대하고 삼부회는 파행, 평민들은 국민회의를 따로 꾸리는데요. 루이16세는 이를 탄압하려하고, 이를 인지한 시민들이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통해 국민회의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무기를 탈취해 루이16세의 정적이 수감돼있는 정치범 수용소,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아무리 분노한 시민들이라도, 잘 훈련된 정부군에 대항하는 게 왠만한 용기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와인이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옵니다. 감옥을 습격한 군중 중 일부는 근처 지하실에서 가져온 포도주에 취해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 덕분에 용기를 내 앞으로 나아가 바스티유를 습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삼부회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삽화. 성직자와 귀족을 등에 업은 제3신분.
혁명의 피를 상징하는 레드와인
아울러 혁명이 가속화하면서 수세기 동안 특권층의 독점물이었던 와인의 생산·유통이 과거보다 자유로워집니다. 전국적인 혁명 기간동안 와인 가격이 낮게 통제되면서 와인은 혁명을 상징하는 물품 중 하나가 됐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에서도 이러한 당시 모습이 묘사됩니다. 프랑스 혁명 중 와인에 대한 세금이 철폐됐고, 당일 파리에는 와인 200만ℓ가 세금없이 반입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자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축하연을 벌였습니다.

어디 그것 뿐이었을까요. 레드 와인의 붉은 색은 혁명가들의 시와 노래에서 혁명의 거리에 범람하는 애국자들의 피로 형상화 됐습니다. 당시에는 와인을 마시는 행위가 혁명적인 공화당의 미덕을 기리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혁명 이후 혁명으로 생겨난 정파들에 의해 좌지우지 됐는데요. 재밌는 점은, 양대 정파인 자코뱅파(급진)와 지롱드파(온건)가 와인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주면서 와인을 가지고도 대립했다는 겁니다.

좌파, 좌익이라는 단어의 시작이 된 자코뱅파는 급진적인 진보를 표방했는데요. 와인과 같은 사치품을 귀족적 과잉의 흔적을 도덕적으로 부패시키는 반혁명주의 물질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빵을 농민과 평민을 위한 음식으로 선호했고, 와인을 마시는 것은 공동 희생이 요구되는 시대에 부르주아적 타락과 비애국적 이기심을 상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온건주의를 지향하고 루이16세의 처형에도 반대했던 지롱드파는 와인을 본질적으로 반혁명주의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와인 산업에 해박했고, 와인 거래의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를 옹호했습니다. 이는 지롱드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롱드는 보르도를 관통하는 강의 이름입니다. 당시 보르도는 와인 산업의 발달로 부르주아 계급이 많았고, 이들은 와인으로 부를 쌓은 부르주아 계급이었습니다.

제3신분이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는 프랑스 혁명 그림. [출처=게티이미지]
어쨌든 발전한 와인 산업
어쨌든 혁명은 프랑스 와인 무역 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귀족 특권이 폐지되면서 이전에는 산업에 접근할 수 없었던 상인과 재배자들이 이제 자유롭게 산업에 진입할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와인 판매를 방해하는 번거로운 규제와 의무가 자유 시장 정책에 따라 철폐되면서 무한 경쟁의 시대가 열렸고, 이는 프랑스 와인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시기 많은 와이너리들이 소규모 지역 사업 수준에서 전국적인 사업으로 와인 판매·유통망을 확장했습니다. 과거부터 유명하던 와이너리 역시 귀족 고객과의 제한적인 계약에서 벗어나 자신의 브랜드를 개발하고 판매할 수 있게됐고요.

물론 프랑스의 모든 와이너리가 긍정적으로 성장한 것은 아닙니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집권과 실각, 세계대전 등 프랑스가 다양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본격적으로 휘말렸기 때문입니다.

와인에 대한 프랑스의 열정은 이러한 격동의 시기를 견디며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습니다. 프랑스의 와인 산업은 단순히 양적인 부분과 기본에 충실한 와인을 넘어 떼루아를 담은 특색있는 고품질 와인으로 발전합니다. 프랑스 와인이 1800년대 이후 세계를 제패하는 데에 중요한 자양분이 된 셈입니다.

오늘날 포도를 키우고 와인을 양조하는 나라는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지만, 모두가 와인을 얘기할 때 프랑스를 빼놓지 않는 것은, 그들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와인이 끊임 없이 등장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와인프릭이 2주간 쉬어갑니다. 필자가 유럽연합(EU) 산하 위원회 European Sustainable Wines의 Study Campaign에 선발돼 스페인과 그리스로 출장을 다녀옵니다. 2주 뒤 현지의 생생한 이야기를 더 재밌게 전달하겠습니다.

*참고자료

- The French Revolution: 140 Classic Recipes made Fresh & Simple

- A Revolution in Taste: The Rise of French Cuisine, 1650–1800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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