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개·고양이 밥을 내가 먹어도 된다고?...휴먼 그레이드 사료 열풍

이태동 기자 2023. 9. 2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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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짜리 말티즈를 키우는 김모(41)씨는 얼마 전부터 ‘휴먼 그레이드(human-grade)’로 알려진 사료만 사 먹이고 있다. 관절 영양제, 면역력 강화제, 유산균 등 종류도 다양하다. 사료 업계에서 휴먼 그레이드는 ‘인간 식품과 같은 기준으로 만든’ ‘인간이 먹어도 괜찮은’ 수준이란 뜻으로 통한다. 김씨는 “우리 아이(말티즈) 나이가 사람으로 치면 벌써 50대로 노화를 걱정해야 될 시기가 됐다”며 “휴먼 그레이드 제품이 일반 사료보다 조금 비싸긴 하지만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아낄 게 뭐 있겠느냐”고 했다.

전 국민의 4분의 1이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시대, ‘휴먼 그레이드’가 사료 업계 최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반려동물에게 더 안전하고 건강한 사료를 먹이고 싶어하는 주인의 마음을 공략하려 너도나도 ‘휴먼 그레이드’ 제품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동물을 친구나 가족처럼 여기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인간도 먹을 수 있다’는 기준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돼 가는 분위기다. 업계에선 “휴먼 그레이드 경쟁의 승자가 약 2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반려동물 식품 시장 전체를 주도하게 될 것”이란 말이 나온다.

동원F&B 반려동물 식품 브랜드 ‘뉴트리플랜’. /동원F&B

◇“인간이 먹어도 되는 개·고양이 식품”

풀무원은 최근 기존의 펫푸드 브랜드 풀무원아미오의 성격을 휴먼 그레이드에 맞게 재정립했다. “반려동물을 가족 구성원으로 인식하는 ‘펫 휴머니제이션(pet humanization)’ 트렌드에 맞춰 시장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반려동물의 건강에 해롭거나 오래 섭취하면 좋지 않은 첨가물의 기준을 수립해 관리하고, 사람이 먹는 식품 두부·나또 등을 활용한 반려동물 식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대웅의 반려동물 자회사 대웅펫은 “사람처럼 반려동물도 영양 불균형 때문에 질병을 겪는다”면서 휴먼 그레이드의 췌장염·피부병 예방 영양제 등을 판매 중이다. 앞서 지난 4월 반려동물 스타트업에서 ‘휴먼 스탠다드’ 콘셉트로 성과를 낸 이효준씨를 영입해 CEO로 선임한 뒤 ‘인간 기준’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대웅펫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품 원료를 쓰고, 인간용 건강기능식품을 만드는 시설에서 개·고양이 건기식을 만드는 등의 관리를 하고 있다”며 “휴먼 스탠다드를 내세운 이후 상반기 매출이 지난해 동기 대비 10배 늘었다”고 했다.

hy의 유산균 음료 제품 '건강하개 왈'. /hy

하림펫푸드도 ‘100%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강조한 휴먼 그레이드 제품 덕에 지난해 매출 366억원, 영업이익 19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냈다.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233%가 늘었다. 이 업체는 식품으로 인증된 원료를 사용하고, 합성보존료는 쓰지 않으며 4년 연속 HACCP 인증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신선식품과 같이 반려동물 식품에도 유통기한과 제조일자를 표기한 것도 특징이다. 야쿠르트로 유명한 hy는 인간 제품과 비슷하게 유산균을 펫푸드로 만든 ‘펫쿠르트’ 제품 강화에 나섰다. 인기 제품을 연상시키는 반려동물 전용 유산균 제품 ‘건강하개 프로젝트 왈’은 지난 4월 출시 후 9월까지 매출이 일반 상품 대비 3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밖에 동원F&B, 종근당바이오 등도 휴먼 그레이드 반려동물 식품을 내놓고 경쟁하고 있다.

◇“쏟아지는 휴먼 그레이드 제품, 공인 기준 필요해”

이렇게 최근 출시되는 반려동물 식품 대부분이 ‘휴먼 그레이드’를 강조하다 보니, 한편에선 ‘휴먼 그레이드의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한 것이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휴먼 그레이드 제품은 일반 제품보다 10~20% 비싼 경우가 많은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단순 마케팅 구호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는 의구심을 해소해줄 만한 공적 기관의 인증 제도는 없다. 반려동물 식품은 의약품 외엔 모두 사료관리법에 따라 분류·관리되고 있을 뿐이다. 각 기업은 자체 기준에 따라 제품을 만들어 홍보한다. 최근 대웅펫 등 일부 업체가 민간 차원의 인증제도 설립에 나섰지만, 아직 초기 단계다.

AAFCO가 소개하는 활동 내용. /AAFCO 홈페이지

해외도 상황이 비슷해, 세계 최대 반려동물 시장인 미국에선 ‘휴먼 그레이드’라고 보기 어려운 부적절한 사료를 쓰거나, 허위·과장 광고를 하는 등 문제가 꾸준히 발생해왔다. 이런 일이 이어지자 작년 12월 비영리단체인 미국사료관리협회(AAFCO)가 휴먼 그레이드의 표준을 정해 발표했다. 원료 성분은 인간 식품법에 맞게 보관·취급돼야 하고, 생산 시설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 규제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등 내용이다. 포장의 경우는 제품 이름보다 큰 글씨로 ‘휴먼 그레이드’를 강조하면 안 된다고 했다. 한 반려동물 식품 업체 관계자는 “공적 인증 제도가 생기면 제품 신뢰도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생산 비용이 늘어나더라도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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