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난에 발라디 값 2~5배 오른 이집트… ‘제2 아랍의 봄’ 우려도[글로벌 현장을 가다]
밥상 물가 상승에 서민들 고통
이달 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러시아의 곡물협정 복귀를 설득했으나 소득 없이 끝나며 ‘급한 불’도 끄지 못했다. 재래시장에서 만난 리야드 무함마드 씨는 “뉴스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과 곡물협정 (중단) 얘기도 잘 알고 있다”며 “먹고살아야 하니 밀이 비싸져도 다른 방법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밀 부족 현상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이달 초 찾은 ‘10월6일시(市)’에 있는 대형 곡물 저장창고(사일로) 단지는 인적이 드물었다. 카이로 도심에서 약 40km 떨어진 이곳에는 이집트 곡물 유통 대기업들의 사일로가 한데 모여 있어 곡물을 실어나르는 대형 트럭들로 붐볐다. 이곳에 저장된 밀은 가공 작업을 거쳐 카이로 및 인근 대도심 상점들로 유통된다.
곡물창고 단지에서 10년 넘게 먹거리 노점상을 하고 있다는 상인은 “예전 평일 같으면 곡물 포대를 가득 담은 차들이 밤낮없이 지나다녔는데 요즘 평일 오후에는 눈에 띄게 도로가 한산하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30∼40%는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사일로 경비원도 “오늘 창고로 들어오는 차가 늦게나 한 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중산층 이상이 거주하는 카이로 인근 뉴카이로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밀 수급이 옛날 같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대형마트 빵집에서 일하는 아티아 씨는 “예전처럼 매일 아침 빵 나오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정하기 힘들다”며 “주문한 밀이 공장에서 언제쯤 도착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소연했다.
“외식 부담에 도시락 싸서 다녀”
이집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채소인 양파와 토마토 값도 2배 이상 뛰었다. 택시 운전사인 칼레드 압둘라 씨는 “식당에서 보통 끼니를 해결했는데 요즘엔 외식 물가도 부담스러워 일주일에 사흘은 도시락을 싸갖고 다닌다”고 말했다.
농산물과 식료품 가격 상승이 의료, 주택을 비롯한 전반적인 물가 상승을 이끄는 애그플레이션(농업+인플레이션) 현상도 뚜렷하다. 10일 이집트 통계청(CAPMAS) 발표에 따르면 지난달 연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7월 38.2%에서 1.5%포인트 오른 39.7%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곡물, 육류, 가금류, 생선, 과일 상승 폭이 매우 컸다.
소비자물가지수(CPI)도 지난해 같은 달 대비 37.4%나 상승했다. 지난해 말까진 2021년 대비 CPI 상승률이 10%대였지만 올 2월부터 줄곧 30%를 웃돌고 있다. 올해 한국의 전년 대비 CPI 상승률은 2∼3% 수준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고 흑해곡물협정 재개마저 안갯속이 되자 이집트 정부는 자국 밀 생산량을 늘리는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이집트에서 생산된 밀은 약 980만 t. 2021년 생산량 900만 t에서 1년 만에 80만 t을 늘렸다. 2010년(720만 t)부터 1년에 20만 t 이내로 늘려 오던 생산량을 급히 늘린 것이다.
또 리비아 남동부, 수단 북서부와 국경을 맞댄 샤르끄엘오와이나트 지역을 대규모 밀 생산지대로 개간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사막지대를 경작하기 위해 국민을 집단 이주시켜 연간 곡물 300만 t 생산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인구 약 1억500만 명인 이집트 밀 소비량을 충족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이집트는 매년 밀을 약 1200만 t 수입하고 있다.
카타르 국영 알자지라 방송에 따르면 이집트 정부는 주요 밀 수입국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중심에서 호주 브라질 불가리아 프랑스 독일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등으로 다각화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식료품 구매를 위한 보조금 지원도 1277억 파운드(약 5조5700억 원) 규모로 늘릴 방침이다.
‘아랍의 봄’ 다시 부르나
이집트 정부가 밥상 물가를 잡기 위해 여러 정책과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곡물을 비롯한 식료품 가격이 당장 떨어지는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자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내년 2월 대통령선거가 예정된 가운데 경기 침체와 이집트파운드화 가치 폭락이 겹치며 민생이 불안해지자 ‘제2의 아랍의 봄’ 같은 사태가 벌어져 정권 교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2011년 아랍의 봄 시위 당시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집결한 시위대 수만 명은 “빵, 자유, 정의”를 외쳤다.
2014년부터 장기 집권하고 있는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은 성난 민심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최근 양파 가격이 폭등하자 정부는 “탐욕스러운 무역업자들 때문”이라며 비판의 화살을 수입업자들에게 돌렸다. 가격 안정화를 위해 이집트에서 난 양파 수출을 3개월 동안 제한하는 조치도 발표했으나 민심은 쉽게 잦아들지 않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 일간지 더내셔널은 26일 “누군가 절도를 비난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를 식량난 조짐으로 본다”며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성난 이집트 민심을 보도했다. 이집트 상공회의소 채소연합 관계자는 더내셔널에 “대외적 악조건도 있었지만 정부도 식량난, 물가 상승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기윤 카이로 특파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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