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김대중·노무현 정신, 그리고 이재명 정치

구혜영 기자 2023. 9. 27. 18:4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어려움을 겪을 때 당 관계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 “이 당이 어떤 당인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배출한 당이라는 뜻이고 첫 평화적 정권교체, 시민참여 민주주의로 한국 정치사의 물줄기를 바꿨다는 자부심이다. “이 당이 어떤 당인데”는 민주당 정치에 대한 질문이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김대중·노무현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신의 본질은 통합이다. 김 전 대통령은 총재 지분의 30%를 비주류 몫으로 돌렸고, 비주류 김상현·정대철은 그 지분으로 공천권을 행사하며 세력을 유지했다. 노 전 대통령은 ‘바보 노무현’으로 불렸다. 지역주의 해소를 위해 서울 종로를 버리고 세번째 부산 도전을 불사한 그에게 지지층이 붙인 별명이다. 2002년 대선 때는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의 요구를 수용해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결단했다. 통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지역주의 도전도, 후단협 포용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신은 정당·의회 정치가 민주주의의 본질임을 강조한다. 김 전 대통령은 최고위원제를 신설해 총재 권한을 나눴고, 노 전 대통령의 당정분리 선언으로 열린우리당은 당 의장 선출제를 도입했다. 이는 박상천, 한화갑, 정동영, 신기남 등 후배 정치인들이 거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두 전직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정을 이끌었다. 김대중 정부가 김종필의 자민련과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노 전 대통령이 선거구 개편을 위해 대연정을 제안한 것은 이 한계를 돌파하려는 자구책이었다. 그러나 정당과 국회가 시민의 집단적 모습이고, 시민권을 더 넓히려면 강한 정당과 강한 국회가 필요하다는 국정 최고 책임자의 의지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지지층과 두 전직 대통령은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다. 노사모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노 전 대통령은 노사모를 동원하거나 정치행동에 나서달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입당해 풀뿌리 정치도 하고, 당원으로서 할 수 있는 정치를 하라고 했다. 노사모는 노 전 대통령에게 권력을 잡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대통령직도 하고 싶다니까 도왔을 뿐 노사모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라크 파병 사태처럼 진보의 가치와 어긋나는 문제에 앞장서 반대했던 게 노사모였다.” 김 전 대통령 지지층도 김대중 정부의 동진 정책을 호남 소외를 더 크게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했다. 지도자는 지지층에게 지지의 명분을, 지지층은 지도자가 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 것, 김대중·노무현 정신이 지향한 길이었다.

체포동의안 가결 후 민주당을 보며 김대중·노무현 정신을 생각한다. 가결파를 상대로 색출, 징계 요구가 쏟아진다. 반대파를 적으로 간주하는 배제의 정치다. 곧이어 부결에 투표했다는 국회의원들 자백에 투표용지까지 공개됐다. 168석으로 국회법을 개정해 무기명 투표를 없앨 일이지 대놓고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허접한 정치를 보게 될 줄이야. 양당 중심의 경합형 국회에선 당 진로와 관련된 중대 사안은 당론을 정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자유투표에 맡겨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고도 최고위원회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외려 원내지도부가 물러났다. 가결파의 방탄·내로남불 탈피 요구 역시 ‘반이재명’ 구호에 덮여, 공천을 겨냥한 권력투쟁으로 빛이 바랬다. 강성 지지층은 가결파의 정치생명을 끊겠다고 하고 문재인 전 대통령 탈당을 압박하며 정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내년 총선에서 색출 논란이 경선 구도가 되면 정권 심판론은 희석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민주당 상황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도 27일 사법부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을 결정했다. 무소불위의 검찰 수사가 법원의 벽을 넘지 못하면서 이 대표는 사법 리스크 족쇄를 벗게 됐다. 하지만 사법 리스크는 지난 대선 이후 적대적 공생, 총선 전략이라는 프레임 싸움으로 확전되곤 했다. 검찰의 추가 대응과 재판 절차를 고려하면 이 대표 말처럼 앞으로도 강물이 똑바로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간 잘못된 길로 갈 때 민심이 멱살 잡고 덤비면 잡혀주기라도 했던, 그래서 시민 주권을 대표한다는 확신을 줬던 게 국민의힘과 달랐던 민주당 정치 아닌가. 응징 대신 화합으로 당을 이끌고, 야당이 싸울 때 민생과 평화는 어떤 모습일지 보여달라. 지금은 김대중·노무현 정신으로 민주당의 길을 다시 찾아야 할 때다. 이재명의 진짜 정치는 이제 시작이다.

구혜영 논설위원

구혜영 논설위원 koohy@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