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지방’은 없다

기자 2023. 9. 2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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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지역’을 곧잘 가는 편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지방’이라는 말 대신에 ‘지역’이라는 표현을 쓴다. 지방이라는 말이 서울중심주의가 철저히 내면화된 우리 사회에서 비하 또는 멸칭의 의미로 잘못 통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또한 하나의 지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현실을 보라. ‘시골’이나 ‘촌스럽다’라는 말 또한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시골이라는 말은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고, 촌스럽다는 말 또한 더 이상 쉽게 변하지 않는 한결같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근 방문한 지역은 전남 고흥과 강원 춘천·속초 그리고 경북 영천이다. 배운 게 도적질이라고 했나. 어느 도시를 방문하면 그 지역의 문인이 누구였는지 떠올리며 혼자만의 문학기행을 하는 오래된 버릇이 있다. 고흥 거금도에 갔을 때 소설가 전성태의 <퇴역 레슬러>(2000)를 떠올리고, 속초에 갔을 때 소설가 이경자의 <순이>(2010)를 생각하는가 하면, 영천에서는 소설가 하근찬의 <수난이대>(1957)와 <야호>(1970~1971) 속 주인공들의 모진 운명을 연상하는 식이다. 영화 <변산>(2018)에 등장해 유명해진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라는 구절을 읊조리며 지는 해를 보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지역을 ‘공간적으로’ 인식하려는 시선은 지역 사람들이 긍지를 갖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지난 8월 초 속초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한 ‘속고양’ 포럼에서 발표한 <사라지는 도시, ‘살아지는’ 도시>에서 ‘지역은 사람이다’라는 명제를 주목하자고 제안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속고양’은 강원 영북(嶺北) 문화권에 속하는 속초·고성·양양을 아우르는 호칭이다. ‘지역은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잘 작동하려면 젊은 사람,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마음껏 활보하고, 활개 치고, 활동할 수 있는 도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활기’가 넘쳐야 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비롯해 젊은 사람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대학 하나 없는 속초에서 청년들이 19세가 되면 고향을 떠날 채비를 한다는 말이 왜 그렇게 쓸쓸하게 들렸을까. 비단 속초뿐일까.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해야 한다. 서울의 시선이 아니라 지역의 눈으로 전환해야 한다. 국민소득 3만달러를 돌파한 일류 선진국이 되었다고 우쭐해할 게 아니라, 지역을 대표하는 출판사 하나, 잡지 하나, 서점 하나 없는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서점 하나 없는 자치단체가 7곳이나 되고, 서점 소멸 예정 지역이 29곳으로 추산되는 지역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초라한 경제동물이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추석 명절이 시작됐다.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불황 탓만도 아닐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의 ‘공기’가 나쁜 탓이 클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와 나라에 대해 “안돼요” “없어요” “못해요”라며 ‘노(no)답’ 3종 세트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와 나라가 좋은 현상은 분명 아닐 것이다. 어떻게 내가 사는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인가. ‘지방에서 지역으로’ 시선과 언어를 전환하고, 지역의 서점·출판사·잡지·작가 등을 기억하자. ‘지방’은 더 이상 없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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