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의 이야기의 발견] 항아, 달의 이야기

기자 2023. 9. 2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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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딱 둘밖에 없다는 불로장생의 약을 눈앞에 두고, 남편과 아내의 대화는 끝없이 표류했다. 한 개를 먹으면 늙지 않고, 두 개를 먹으면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신령스러운 약이었다. 누가 어떻게 약을 먹어야 할지 의논하면서 사흘 밤낮을 지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태양이 지는 쪽을 향해 날마다 걸었어. 당신도 알다시피 한꺼번에 하늘로 떠오른 열 개의 태양 가운데 아홉 개를 내가 활로 쏘아 떨어뜨렸잖아? 세상이 불구덩이가 되는 것을 구한 공만으로도 약은 내 맘대로 처분하는 게 마땅해. 생각해 보면 태양이 하나라서 다행이었어. 여러 개였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우왕좌왕했을 거야. 험한 산을 넘고 지평선이 아득한 광야를 가로질렀어. 울창한 숲에서 길을 잃기도 했지. 그러면서 여섯 괴물을 만나 차례로 싸움을 벌여야 했어. 길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괴물, 사람 얼굴을 하고 아기 우는 소리를 내는 소,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이무기, 폭풍을 일으키는 사나운 새, 코끼리를 삼키는 구렁이, 식인을 즐기는 거대한 멧돼지. 활로 쏘고 칼로 베었지.”1)

남편의 말이 끝나자 아내가 입을 열었다.

“나도 쉽게 약을 구한 건 아니야. 내 몸을 지키기 위해 무쇠 신을 신고 무쇠 지팡이를 들고 걸어야 했지. 길을 묻다가 소처럼 쟁기를 끌어 밭을 갈아주었고, 검은 옷이 하얘지고 흰옷이 검어지도록 빨래를 해야 했어. 숯에서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씻어야 했고, 아흐레 밤낮 동안 밭에서 풀을 뽑아야 했지. 귀신이 울며 막아서는 열두 고개를 넘은 뒤, 죽은 영혼이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강물 위로 배를 타고 건너야 했지. 그게 끝이 아니야. 삼 년 동안 나무를 하고, 불을 때고, 물을 길어와야 했어.”2)

아내가 말을 마치자 남편이 물었다.

“약을 가져온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당신이란 말인가?”

남편의 물음에 아내가 발끈했다.

“그럼, 당신이 가져왔다는 건가?”

“서쪽으로 갔더니 높은 산이 나타났지. 산속 깊은 곳에는 삼천 년 만에 한 번 꽃이 핀다는 복숭아밭이 있었고, 보석처럼 빛나는 호수도 있었어. 그 옆에는 궁궐이 있는데 그곳에 사는 아름다운 여신이 나에게 그 약을 주었어.”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반박했다.

“아름다운 여신이라고? 표범의 꼬리가 달리고 호랑이 이빨이 돋아 있지만, 풀어헤친 머리카락에 옥비녀를 꽂고 있어서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이였지. 세상을 구하라며 환약 두 알을 건네주었어.”

“밭 갈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불 때고 물 길어오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구할까. 태양을 쏘아 떨어뜨리고 괴물을 베어 없앤 나 같은 영웅이 해야 할 일이지. 약을 나눠 먹고 함께 영생을 누리자.”

미로와 같은 대화가 마무리되려는 순간, 항아는 일어나 남편을 뒤로 밀었다. 예가 쓰러지자 가슴팍에 걸터앉아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초승달 같은 칼끝이 예의 목을 겨누었다.

“영웅은 필요 없다. 세상을 나에게 다오.”3)

예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항아는 하늘로 올라가 달에 머물게 되었다. 달에서는 세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밝은 빛무리 몇 군데가 눈에 띄었고, 역사는 그것을 문명이라 불렀다. 이따금 폭발하기도 하는 문명의 빛은 세상의 일부를 비추었을 뿐 전부를 비춘 적은 없었다. 빛무리 주변은 황량한 어둠이었고, 그곳은 역사책에서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의 영역이었다. 그들을 위해 문명이 한 일은 많지 않았으며, 그들의 삶은 거의 무의미한 고통으로 이어졌다.4)

항아는 깨달았다. 하늘에 높이 떠서 세상을 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다만 사람들이 달을 바라보며 슬픔을 말할 때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이었다. 항아의 눈물이 흘러넘쳐 세상의 모든 물이 되었다. 그래서 달은 천 개의 강과 하나의 바다에 잠긴 채 세상을 비추는 것이다.

1)예와 항아 2)바리데기의 신화 3)강증산과 고판례의 일화를 가져와 재구성함 4)시어도어 젤딘의 <인간의 내밀한 역사> 속 문장을 변형해 인용함.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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