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 과학적 회의주의가 막은 비극
1960년 9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심사관으로 근무하던 프랜시스 켈시는 자신 앞에 쌓인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윌리엄 머렐사에서 판매 허가를 요청한 약물 ‘케바돈(Kevadon)’의 미국 내 판매 허가 요청서였다. 사실 케바돈은 새로 개발된 약이 아니라 이미 유럽에서는 몇 년 전부터 판매되고 있던 ‘콘테간(Contergan)’이라는 약물 이름만 바꾼 동일한 약이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일반의약품으로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약물이었기에 별다른 추가 테스트 없이 허가해도 무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가 켈시의 마음에 걸렸다. 서류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당시 FDA의 규정상 인체에 사용되는 모든 약물은 시판 허가를 받기 전에 동물실험을 실시해야만 했고, 해당 서류에도 관련 결과가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결과지에는 케바돈을 이용한 동물실험 과정 중 사망한 동물이 없었다고 기록돼 있었다. 통상 판매되는 용량의 수백배를 투여했는데도 케바돈은 동물에게 별다른 이상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 결과대로라면 케바돈은 효능은 확실하면서도 부작용은 없는 그야말로 ‘환상의 약물’이었다. 켈시의 의심은 바로 여기에 머물렀다.
세상에 완벽하게 안전한 물질이란 존재할 수 없다. 특히 생명체에겐 말이다. 생명체란 정교하게 균형 잡힌 일종의 시스템이어서 어떤 물질이든 지나치게 많이 유입되면 시스템의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케바돈은 고농도에서도 뚜렷한 치사율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결국 케바돈의 허가를 보류했고, 서류는 다시 제약사 측에 되돌아갔다.
하지만 약물의 뚜렷한 하자가 없었기에 켈시는 행정적 절차 규정을 이용해 시간을 끌었다. 당시 FDA 규정상 심사관은 추가 서류를 요청할 수 있었고, 제출된 추가 서류를 검토하는 데는 최장 60일이 주어졌다. 켈시는 이를 이용해 60일마다 추가 서류를 요청했다. 무려 네 번이나. 이에 케바돈의 미국 내 유통권을 가진 머렐도 가만 있지 않았다. 케바돈, 즉 콘테간은 유럽에서 연간 100만정씩 팔리고 있는 성공한 약물이었기에, 허가가 지연될수록 제약회사는 그 기간만큼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지켜보기만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머렐은 앞으로는 거절된 허가서를 보완해 다시 제출하면서도, 뒤로는 온갖 술수를 동원했다. 그들은 켈시가 관료주의적 잔소리꾼이란 중상모략을 퍼뜨려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엄청나게 많은 편지와 전화를 통해 업무를 방해했고, 직접 방문해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FDA에 항의해 그를 해고시킬 것이라는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
이는 켈시에겐 위협적이었다. 케바돈 허가 업무는 켈시가 FDA에 입사하고 첫 번째로 받은 업무였고, 1960년대 여성 연구자라는 그의 처지는 그리 단단한 기반을 갖춘 것이 아니었다. 켈시가 완강히 거부해도 그는 한 개인일 뿐이었기에 언제든 업무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FDA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평판 때문에 이직하기도 어려워보였다.
하지만 켈시는 꿋꿋했다. 공식적으로 주어진 시간 동안 그는 케바돈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수집했고, 관련 논문에 주목했다. 그의 동료와 상사들도 힘이 돼주었다. 한 동료는 독일어 문서에서 번역 실수를 발견했고, 다른 동료는 사람과 생쥐의 약물 흡수율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해 서류가 반려될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그를 FDA에 채용했던 유진 케일링 박사를 비롯한 상사들은 외부의 압력에도 끝까지 그를 믿어주었고, 방패막이가 돼주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결국 시간은 켈시의 편이었다.
1961년이 되자 유럽에선 사지가 기형인 아이들에 대한 보고가 급증했다. 끔찍한 비극의 원인을 찾던 이들은 그것이 임신부들에게 입덧 방지제로 처방됐던 콘테간, 성분명 탈리도마이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결국 탈리도마이드를 주성분으로 만들었던 케바돈의 허가는 철회됐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약물, 특히 임신부와 태아에게 처방되는 약물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게 바뀌기에 이른다.
이듬해 켈시는 끔찍한 약물의 미국 내 유통을 막아 비극의 생성을 차단했다는 이유로 케네디 대통령에게 공로상을 받게 된다. 이 자리에서 켈시는 자신이 끝까지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는 의학적 신념뿐 아니라 동료와 상사들의 지지가 큰 힘이 돼주었다고 말했다. 과학적 회의주의에 입각해 합리적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켈시와 외부 압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실을 위해 함께 싸워주었던 동료들의 믿음과 연대는 그때뿐 아니라, 반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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