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티벌의 재미있는 새 친구, 케이팝 [K콘텐츠의 순간들]

더웠다. 더워도 정말 너무 더웠다. 어느 정도로 더웠느냐 하면 내가 지금, 이 공간에 있다는 게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을 정도로 더웠다. 8월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도쿄는 그야말로 절절 끓었다. 당일 최고 기온 36℃, 체감 온도는 44℃에 육박했다.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는 날씨 소식을 전할 때마다 양 눈썹을 여덟 팔(八) 자로 만들며 노약자는 물론 일반인도 외출을 자제해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도쿄에 도착한 지 며칠째, 구름 한 점 만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도쿄의 여름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공연 시각은 정오, 낮 12시. 입장 팔찌 교환과 공연장 입장 시간을 생각하면 늦어도 오전 10시30분에는 도착해야 했다. 목적지는 일본 지바현 지바시에 위치한 ‘조조(ZOZO) 마린 스타디움’. 일본을 대표하는 대형 음악 페스티벌 ‘서머소닉 도쿄 2023’이 열리는 장소였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 도쿄의 무더위를 이겨내고, 뉴진스의 무대를 봐야만 했다.
처음 라인업을 발표할 때만 해도 그렇게까지 간절한 건 아니었다. 이제 막 데뷔 1년을 넘긴 그룹이고, 앞으로 공연을 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안일한 생각을 바꾸게 한 건 서머소닉 개최 2주 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롤라팔루자’ 중계였다. 이건 지금이다. 지금 봐야만 한다. 휴대전화 액정 속에서 영원히 100% 여자아이로 살 것만 같던 멤버들이 밴드 편곡과 앨범 단위 호흡으로 적절히 구성된 세트리스트 위를 강철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도쿄에서 만난 뉴진스도 그 기운 그대로였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열기가 채 빠지지 않은 무시무시한 태양과 대기 아래, 다 같이 벌겋게 익어가던 뉴진스의 무대는 그 와중에도 넘치게 싱그럽고 흥겨웠다. 도쿄도 뜨겁게 부응했다. 페스티벌 기준, 그 이른 시간에 조조 마린 스타디움이 가득 찼다. 대다수의 관객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때로 춤을 췄다. 덕분에 공연 중반에는 관객 안전을 위한 공연장 입장 제한이 걸리기도 했다. 올해 페스티벌의 양일 헤드라이너였던 록밴드 블러도, 래퍼 켄드릭 라마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음악 페스티벌에, 그것도 전 세계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케이팝 가수가 서는 건 이제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올해 뉴진스가 선 ‘서머소닉’은 일찌감치 케이팝을 품은 음악 페스티벌로 유명하다. 2010년, 아이돌 그룹 최초로 빅뱅을 초대했다. 2015년에는 BTS, 2019년에는 블랙핑크를 초청하는 뛰어난 케이팝 선구안을 자랑하기도 한다. 올해 ‘서머소닉’에는 뉴진스 외에도 태양, 강다니엘, 엔하이픈, 트레저가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이 밖에도 올해 케이팝은 페스티벌 홍수였다. 미국 페스티벌 진출 1년 만에 ‘롤라팔루자’ 헤드라이너가 된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웃사이드 랜즈 뮤직 & 아츠 페스티벌’에 선 첫 케이팝 그룹이 된 에스파, 스페인 ‘프리마베라 사운드 2023’에 참가한 레드벨벳, 그리고 무엇보다 2023년 현재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음악 축제로 손꼽히는 ‘코첼라 밸리 뮤직 & 아츠 페스티벌’ 토요일 헤드라이너로 활약한 블랙핑크가 있었다. 해외 음악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케이팝 가수 소식이 ‘빌보드 차트 인’만큼이나 자주 전해진 한 해였다.
팬데믹 전과 후, 달라진 케이팝의 체급
이 같은 흐름이 생긴 건 아무래도 코로나19의 영향이 클 것이다. 세계 곳곳이 코로나로 몸살을 앓은 지난 몇 년간, 음악 페스티벌은 말 그대로 아사 직전까지 몰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 접촉이 금지된 상황에서 최소 수만 명, 많게는 백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몰리는 대형 음악 페스티벌이란 어불성설 그 자체였다. 이제 막 세계를 향해 날개를 뻗어나가던 입장에서 케이팝 역시 크고 작은 어려움에 빠졌다. 다만 타고난 짐승 같은 적응력이 빠른 극복을 도왔다. 케이팝은 팬데믹 기간 다양한 방식의 온라인 마케팅에 도전했고 일부는 실패했지만, 일부는 성공했다. 음반 판매량 상승, 온라인 커뮤니티와 콘텐츠 개발, 4세대 신인들의 선전, 상향평준화된 실력 등 호재를 동력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전과 후, 케이팝의 실질적 체급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분위기 속 조금씩 원형을 찾아가고 있는 음악 페스티벌과 케이팝이 만났다. 유명 음악 페스티벌 라인업에 오른 케이팝 가수의 이름을 보며 느끼는 무언가 인정받은 데서 오는 기쁨은 사실 기분 몇 번 좋으면 끝날 일이다. 실제로 해외 음악 페스티벌이 케이팝을 찾는 건, 케이팝이 가진 화제성과 관객 동원력에 그만큼 힘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페스티벌 라인업은 해당 페스티벌의 얼굴이자 명함이다. 무대와 모객은 성적표다. 명함과 성적표를 고루 충족시킬 만한 여러 선택지 가운데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덩치와 카탈로그를 늘려온 케이팝이 섰다. 라인업에 올리면 화제를 모을 이름도, 탄탄한 팬덤을 갖춘 이름도, 세계적으로 히트한 인기곡을 가진 이름도 있었다. 외면할 이유가 없었다.
한편 이는 케이팝이 그만큼 음악 시장 또는 더 넓은 폭의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음악 페스티벌은 보통 1년에 한 번 열리는 음악인과 음악 마니아들의 축제다. 여기 가도 케이팝, 저기 가도 케이팝이라 잠시 잊었지만, 케이팝은 긴 시간 동안 여러 면에서 ‘그들만의 리그’ 취급을 받아온 대표적 장르다. 케이팝에 노출된 시간이 길어진 새로운 세대의 등장, 날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는 장르 사이의 경계선, 강고한 팬덤만큼이나 불특정 다수의 청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쓰는 케이팝계 내부의 움직임. 문득 뉴진스의 무대를 보며 든 생각이다. ‘이틀 동안 열린 페스티벌 출연자 가운데 내가 이렇게까지 많은 곡을 알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심지어 춤까지 출 수 있는 음악가가 또 있었나?’ 실질적 시너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케이팝과 음악 페스티벌의 만남은 당분간 더 잦아지지 않을까 싶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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