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2000만 관광객이 몰려드는 가마쿠라시의 비밀 [글로벌 현장]
일본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은 어디일까. 코로나19 사태 확산 직전인 2019년 1위는 도쿄였다. 일본인 관광객 9077만 명, 외국인 관광객 1410만 명 등 총 1억487만 명이 도쿄를 찾았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단위 면적(1㎢)당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도시는 어디일까. 답은 가나가와현의 가마쿠라시다. 가마쿠라시의 면적은 39.53㎢로 서울 강남구와 거의 같다. 인구는 17만 명으로 강남구의 3분의 1 수준이다. 이 작은 도시에 매년 인구의 100배가 넘는 2000만 명 안팎의 관광객이 모여든다. ㎢당 관광객 수(2015년 기준)는 57만3000명으로 교토시(6만9000명)의 열 배 정도다.
8월 중순 1주일간의 여름휴가를 일본에서 가장 관광객이 붐비는 도시 가마쿠라에서 보냈다. 휴가철 가마쿠라는 지역 주민들이 안쓰러울 정도로 관광객이 많았다. 그런데도 바가지가 없다는 점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비치 파라솔부터 음료수 한 잔 가격까지 전부 정가제였다. 가게 입간판과 벽면에는 가격표가 착실히 붙어 있었다.
저렴한 가격에는 또 한 번 놀랐다. 225g에 2800엔(약 2만5316원) 하는 스테이크를 제외하면 먹을 것 중 2000엔, 마실 것 중 1000엔이 넘는 것은 없었다. 비치 파라솔을 온종일 빌리는 가격이 1500엔이었다. 모든 가게에서 스마트폰 결제가 가능했다.
해변 식당 ‘파파야’는 6~8월 해수욕 시즌에만 장사하는 가게였다. 파파야의 중년 지배인은 “비치 테이블, 비치 파라솔, 물놀이 기구의 가격은 상가 조합에서 결정하고 먹거리 가격만 가게마다 자율”이라고 말했다. “한철 장사인데 가격을 더 올려 받는게 남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면 손님들이 다른 가게로 가 버리잖아요”라고 답했다.
매년 여름철이면 한국의 일부 지역 축제와 유명 관광지의 바가지 요금이 화제다. 이를 보도한 기사에는 ‘차라리 일본이나 동남아를 가겠다’는 댓글이 넘친다. 이런 흐름을 읽었는지 일본 관광 산업도 ‘리피터율(재방문율)’을 경쟁력으로 내세운다. ‘한철 장사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찾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2019년 3188만 명의 외국인이 일본을 찾았다. 이 가운데 일본을 처음 방문한 관광객의 비율은 35.8%였다. 나머지 64.2%는 적어도 두 번 이상 일본을 방문한 경우였다. 심지어 ‘10번 이상’, ‘20번 이상’ 일본을 찾았다는 외국인도 8.5%와 6.8%에 달했다.
관광객 1명=반도체 96개 수출
흔히 관광을 ‘굴뚝 없는 공장’이라고 한다.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없어도 고용 창출 효과를 낼 수 있는 고부가 가치 산업이다. 외화를 벌어들이는 관광을 ‘보이지 않는 무역’이라고도 한다. 외국인 관광객 1명이 쓰고 가는 돈은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 96개를 수출한 것과 맞먹는다는 분석도 있다.
이웃 나라인 한국과 일본은 관광 산업에서도 라이벌일 수밖에 없다. 한국관광공사가 2019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 방문 시 비교 대상으로 삼은 국가는 일본이 54.3%로 가장 많았다.
결과적으로 한국만 방문했다는 응답이 93.7%로 압도적이었지만 ‘다른 나라를 함께 방문했다’는 응답자 가운데 39.7%는 ‘한국 전에 일본을 방문했다’고 답했다. 한국이나 일본 가운데 한 나라를 콕 집어 여행하는 게 외국인 관광객 절대 다수의 선택인 만큼 상대방을 꺾지 못하면 자신이 망하는 ‘제로섬 게임’이 관광 산업에서도 벌어진다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관광 한·일전’에서 한국은 고전하고 있다. 2019년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수는 3188만 명으로 1750만 명인 한국의 두 배에 달했다. 2021년 세계경제포럼(WEF)의 관광 경쟁력 지수에서 일본은 1위를 차지한 반면 한국은 15위에 그쳤다.
한국의 관광 수지는 2000년 이후 22년 연속 적자를 나타냈다. 2017년에는 147억 달러(약 19조5878억원)의 적자를 봤다. 반면 일본의 관광 수지는 2015년 53년 만에 흑자로 전환됐다. 2019년에는 2조7023억 엔의 흑자를 내는 등 8년 연속 관광 수지 흑자를 이어 가고 있다.
일본의 올해 1분기 여행 수지가 7408억 엔 흑자로 작년 4분기의 5258억 엔보다 개선된 반면 한국의 여행 수지는 32억4000만 달러 적자로 작년 4분기의 23억 달러 적자보다 악화됐다.
2013년까지만 해도 수치상으로는 한국이 일본보다 관광 대국이었다. 2013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218만 명으로 1036만명의 일본보다 많았다. 이 때문에 2012년에는 일본이 똑같은 고민을 했다.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관방장관이었던 2012년 일본의 외국인 관광객 수는 840만 명인 반면 한국은 1000만 명을 넘었다. 일본은 역사·전통·문화가 이토록 풍부한데 왜 이웃 나라에 지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정책을 바꾼 기본 생각이 됐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일본은 외국인 관광객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1990년대 후반까지 일본의 관광 정책은 내국인의 해외여행 관리에 중점을 뒀다. 일본 내 관광 산업도 외국인보다 회사의 단체 여행과 연금 생활자 등 내국인을 유치하는 데 더 열심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을 적극 유치하는 방향으로 일본의 정책이 전환된 것은 2012년 말 집권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자신의 국정 운영 방향을 처음 제시하는 시정 방침 연설에서 ‘관광 입국’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다.
관광 입국을 구체화한 정책은 90일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는 국가를 대폭 확대한 일이다. 2013년 스가 전 총리가 관방장관으로서 주도한 정책이다. 때마침 2013년 일본은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됐다. 외국인 관광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필요성이 생기면서 90일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는 국가를 대폭 확대했다.
무비자 확대 덕분에 2012년 836만 명이던 외국인 관광객은 단숨에 한국을 따라잡았다. 관광 예산을 100억 엔에서 680억 엔으로 늘리는 동안 외국인 관광객이 쓰고 간 돈은 1조 엔에서 4조8000억 엔으로 증가했다. 580억 엔을 써서 3조8000억 엔을 벌어들였다.
무비자 확대 덕분에 급성장한 일본 관광 산업
정책을 바꾸고 보니 일본의 관광 산업은 외국인을 불러들이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인프라다. 지금까지 사원 여행과 연금 생활자를 모시기 위해 전국의 산 좋고 물 좋은 곳마다 지어 놓은 골프장과 대형 온천 료칸, 이를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깔아 놓은 지방 공항과 철도·도로가 고스란히 외국인 관광객 용도로 변신했다.
이 같은 인프라 덕분에 2019년 일본 47개 광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을 10만 명 이상 유치한 지역이 42곳에 달했다. 100만 명 이상을 유치한 지역은 13곳, 1000만 명 이상을 불러들인 지역은 도쿄·오사카·지바 등 3곳이었다.
반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의 방문지를 보면 서울(76.4%)과 경기도(14.9%) 등 수도권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시골의 매력이 일본에 뒤지지 않지만 인프라의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라는 분석이다.
인프라가 관광 산업의 하드웨어라면 여행의 서비스는 소프트웨어에 비유할 수 있다. 바가지는 관광객을 두 번 다시 오지 않게 만드는 악성 바이러스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가마쿠라 상인조합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은 시민의식뿐만 아니라 시스템으로 악성 바이러스가 소프트웨어를 망가뜨리는 일을 막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가 열리면서 한국과 일본의 ‘관광 한·일전’도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의 숫자가 다시 역전되는 날을 기대한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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