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포럼] 오펜하이머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가 있다. '오펜하이머'. 유태인계 미국인 핵물리학자로서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하탄 프로젝트'의 연구개발 총괄을 맡아, 불과 3년의 짧은 기간에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태평양 전쟁을 끝낼 수 있게 한 천재의 삶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년 뉴욕의 의류업에 종사하는 독일 출신의 유대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릴 적 부모의 엄청난 교육열 아래서 자랐는데, 사회성이 결여되어 적응을 잘 못했지만, 빠르고 탁월한 학습 능력과 훌륭한 교육환경 덕분에 1922년 하버드대학 화학과에 입학했고 매년 타 학생 대비 1.5배 더 많은 학점을 따내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조기 졸업했다. 이후, 실험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 캠브리지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지도교수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급기야 지도교수를 독살하려고 시도했지만, 다행히 미수에 그쳐 정신과 치료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가 됐다.
이후, 닐스 보어, 페르미,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등 이론물리학의 대가들이 강의하던 독일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9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곳에서도 그의 거만함과 자신감 넘치는 행동은 이어졌는데, 교수의 강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단으로 직접 올라가 수업을 하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괴팅겐 대학의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귀국한 후에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다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교수로 임용돼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을 연구했다. 교수 시절 그는 대인 관계에 서투른 천재, 잘난 체하는 허식가 등으로 불려졌지만, 학생들에게는 대체로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과학 분야뿐 아니라 언어 능력도 탁월해 고교 시절 그리스어를 습득하여 플라톤의 원서를 읽었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산스크리트어를 취미로 공부하여 힌두교 원전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러한 언어능력은 후에 맨하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당시 독일에서는 최소의 물질 단위인 원자도 중성자와의 충돌을 통해 붕괴할 수 있다는 이론이 발표됐다. 나치 독일이 우라늄 유통을 중단하면서 핵무기 개발 가능성이 점쳐졌고, 이에 독일보다 핵무기를 먼저 개발해야 한다는 학계의 의견이 모아졌다.
1942년 1월 19일,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서명한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의 탄원서가 루즈벨트 대통령에 전달되면서 '맨하탄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총괄책임자로는 펜타곤을 불과 6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건축한 공병 출신의 그로브스 대령이 맡았으며,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포함한 미국, 영국, 캐나다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했다. 6000여 명의 연구진과 13만 명의 인력, 20억 달러(현재 기준 330억 달러)의 예산이 투입된 초대형 국책사업으로 테네시 주 오크리지의 우라늄-235 농축시설, 뉴멕시코 주 로스 앨러모스의 핵무기 설계 및 제조 연구소, 워싱턴 주 핸포드의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 등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다.
일설에 의하면, 매주 말, 오펜하이머는 자택으로 연구진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어 격려했으며, 이를 통해 고집 센 천재들과 소통하며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1945년 7월, 드디어 '트리니티'란 별칭의 핵실험을 성공했다. 비록, 독일 히틀러의 극단적 선택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8월 6일과 8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핵무기의 무자비한 파괴력을 경험한 그는 '나는 죽음이며 세상의 파괴자다'라는 힌두교 경전의 내용을 떠올리며, 다가올 핵무기의 참혹한 시대를 예견했다. 결국, 더 강한 살상무기인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했고, 공산주의자로 몰려 청문회에서 모든 사생활이 공개되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과학자들은 지적 호기심을 해결하고 연구 결과가 인류의 행복과 번영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연구한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향후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지적 수준의 한계에서 추측할 뿐이다. 의도치 않은 결과의 가능성에 과학자로서의 역할과 책임으로 어깨가 무거워진다. 윤성철 한국화학연구원 국가전략기술추진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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