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대립 勞-政, 11월 秋鬪 전운… “총선까지 갈등 해법 안 보여”[인사이드&인사이트]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233일 앞둔 2021년 7월 19일.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는 언론 인터뷰에서 “필요한 경우 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한 뒤 쉴 수 있는 예외조항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단기간 고강도 업무가 필요한 정보기술(IT), 게임 업계의 애로사항을 들은 뒤 나온 발언이었지만 ‘120시간 노동’ 논란이 커졌다.
다음 날 윤 후보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120시간 일 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월 단위나 분기, 6개월 단위로 해서 평균 주 52시간을 해도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을 노사 간의 합의로 변형할 수 있게 예외를 뒀으면 좋겠다는 얘기”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싸늘했다. 같은 달 21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게임업계 사장들의 ‘납기만 맞추면 죽도록 일하고 얼마든지 쉬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전달한 것”이라고 일갈하며 ‘친(親)기업, 반(反)노동’이라고 비판했다. 노동계가 윤 후보를 향해 낸 첫 공식 입장이었다.》
#장면2. 야속한 당신
2021년 9월 15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노총 본부에 윤 후보가 찾아왔다. 그는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의 플렉시빌리티(flexibility·노동시장의 유연성)라는 건 자유로운 해고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동계 표심을 돌리려는 노력이었다. 이를 들은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노동을 적대시하고 억눌러왔던 권력자들은 역사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응수했다. 말에 뼈가 있었다.
윤 후보의 노동계 달래기는 계속됐다. 같은 해 10월 23일에는 한국노총 울산본부에도 찾아갔고, 기자간담회에서는 “노동 가치를 존중하지 않으면 경제 산업 발전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해 12월 4일에는 비공개로 김 위원장을 만나 대선에서의 지지를 요청했다. 12월 14일에는 윤 후보는 “정치인은 노동자 편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표가 그쪽에 훨씬 많다. 저는 사용자 편이 아니다”고도 했다. 구애(求愛)에도 불구하고 2022년 2월 8일 한국노총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를 공식 발표했다. 윤 후보 입장에서는 ‘야속한 당신’이었다.
#장면3. 변함없는 친구
#장면4. 헤어질 결심
약 1년 반이 흐른 2023년 9월.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사이 정부는 ‘노동개혁’에 착수했다. 화물연대 파업 이후에는 ‘법치(法治)’ 드라이브도 걸었다. 노조 회계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며 노조 회계장부 공개도 추진했다. 김준영 한국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금속노련) 사무처장은 농성 도중 흉기를 휘두른 혐의로 구속됐다. 한국노총은 노사정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 정부 “법치 지킬 때만 대화 재개”
정부와 노동계가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추석 연휴 이후 전망에도 관심이 쏠린다. 산적한 현안을 풀기 위해서는 노사정 대화 복구, 정부와 노동계의 소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무 부처인 고용부의 기류는 여전히 강경하다.
복수의 고용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부의 입장은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 들어오고 싶으면 오라. 단, 법치를 지켰을 때 이야기”로 압축된다. 건설현장에서의 각종 돈 봉투 의혹, 노조의 위법 관행, 집회 때마다 문제가 되는 위법 사례, 그리고 정부가 요구하는 회계 장부 공개에 대해 노동계의 태도 변화가 있어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대 노총 입장에서는 ‘백기투항’을 요구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정부의 태도는 다소 이례적이기도 하다. 보통 앞선 정부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노동계의 표심을 잡기 위해서, 또는 산적한 법안들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서라도 양보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고용부 관계자는 “선거를 고려하라는 지시도, 분위기도 없다”고 단언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해온 것에 자신감이 붙은 것 같다”고 했다.
5월 국무조정실은 ‘국정과제 30대 핵심 성과’ 자료집을 내며 현 정부 출범 이후 1년간의 근로손실일수를 ‘28만 일’로 집계했다. 근로자 1만 명이 28일간 파업한 셈이다. 국무조정실은 “역대 정부 최저치”라고 자평했다. 같은 기간을 따졌을 때 노무현 정부는 114만 일, 이명박 정부는 69만 일, 박근혜 정부는 65만 일, 문재인 정부는 106만 일이었다. 화물연대 파업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놓고 논란이 있지만 정부는 “법치 정책이 효과를 봤다”는 생각이다.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가 5년 연속 무분규 임·단협 타결을 결정한 것, 철도노조가 2차 총파업 계획을 중단한 것도 정부에 자신감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 노동계 “총선까지 갈등 이어질 듯”
노총은 노총대로 ‘마이웨이’ 중이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추투 전까지 노정 관계가 풀릴 모멘텀은 없다”며 “현재 국면이 총선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한다”고 내다봤다. 그나마 역대 정부와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국노총마저 냉랭하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지금의 정부는 마치 ‘노동계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노조 회계장부 공개, 근로시간 개편 등 주요 정책을 철회하거나 입장을 바꾸기 전까지는 노총도 타협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섣부른 대화 제스처를 취했다가는 지도부가 내부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정부와 노동계가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갈 경우 정부의 노동 정책에도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당장 근로시간 개편 여론조사,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방안, 계속 고용 법제화 등 중요한 정책들이 발표, 논의를 앞두고 있다. 양대 노총을 비롯한 노동계가 반발하고, 민주당 등 야당과 연계한다면 정부 입장에서는 ‘시련의 가을’이 될 수 있다.
화해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곳으로 국민의힘이 8월 23일 출범시킨 여당 산하 ‘노동위원회’가 언급되기도 한다. 변호사, 노무사, 학계 인사 등 50명으로 구성됐는데, 위원장인 김형동 의원은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을 지냈고 21대 국회에 입성했다. 김 의원은 6월 한 노동전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한국노총에 ‘친구’라고 했던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친구는 한 번 틀어진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정부와 노동계 모두 강경하고 그나마 다소 조율의 여지가 있는 것은 국회”라며 위원회의 역할을 기대했다. 양대 노총에 정통한 한 인사는 “한국노총 출신 인사가 지금 고용부 장관인데 소통의 역할은 못 하고 있다”라며 “노사 관계 회복의 열쇠는 결국 윤 대통령이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은택 정책사회부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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