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기적의 빅토리호

배성규 논설위원 2023. 9. 25.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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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영국의 명장 넬슨 제독은 해전마다 승리를 거듭해 기함의 이름도 빅토리호였다. 그는 전투 때 맨 앞에 섰고 직접 하는 백병전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와 맞선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도 빅토리호로 적 기함에 돌진했다가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빅토리호는 아직 퇴역하지 않은 채 영국 포츠머스항을 지키고 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때 무기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군용 상선을 대량 건조했다. 그 배 이름도 ‘빅토리’였다. 길이 140m, 폭 20m 안팎에 모양새도 비슷했다. 빅토리 앞에 ‘SS(Steam Ship·증기선)’와 배를 건조한 지역이나 대학 이름을 붙였다. 이런 빅토리 형제들이 600척에 달했다. 빅토리호는 위험한 대서양 항로나 태평양을 오가며 활약했다. 독일 잠수함과 일본 잠수함, 폭격기의 공격으로 침몰된 경우가 허다했다.

▶6·25가 나자 빅토리호는 다시 전장에 투입됐다. 가장 눈부신 활약은 1950년 흥남 철수 때였다. 메러디스와 레인, 아메리칸, 버지니아 등 여러 빅토리호가 미군·무기·장비뿐 아니라 피난민 7000~1만4000명씩을 태웠다. 특히 메러디스는 무기와 물자를 모두 내려놓은 뒤 피난민을 맨 밑층부터 차례로 태우고 그 위에 강판을 덮은 뒤 또 태우기를 반복했다. 14시간에 걸친 작업 끝에 1만4500명을 태워 맨 마지막으로 흥남항을 떠났다.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에 기록됐다. 12월 25일 아무 사고 없이 거제에 도착한 메러디스 안에서 5명, 레인에서 1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메러디스의 라루 선장은 “하나님이 배의 키를 잡았다”고 했다.

▶미 의회는 그 업적을 기려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갤런트십(gallant ship·용감한 배)’으로 지정했다. 라루 선장은 한·미 양국에서 최고 명예훈장과 무공훈장을 받았다. 메러디스는 6·25 후 베트남전에도 투입됐다. 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퇴역 후 총구를 마주했던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됐다. 지금 미국에 남은 빅토리호는 레인과 아메리칸 등 3척뿐이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 정부와 지자체 등은 빅토리호를 국내로 들여오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보훈처는 캘리포니아의 레인을, 거제시는 버지니아의 아메리칸을 인수하려 했다. 하지만 이송 비용과 미 정부 허가 문제 등으로 무산됐다. 그러다 레인 빅토리호를 들여오겠다며 투자·후원금을 받아 챙긴 일당까지 나타났다. 10만명의 목숨을 살린 빅토리호가 어쩌다 사기의 수단이 됐는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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