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30>] 남해 버블과 뉴턴의 탄식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2023. 9. 2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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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주식회사의 등장, 증권거래소의 발명, 새로운 금융 혁신은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순기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이 돈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는 사회적 해악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 분야의 선구자는 네덜란드였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튤립 마니아

네덜란드인은 1637년의 튤립 광풍(Tulip Mania)을 통해 튤립 구근의 가격을 믿을 수 없는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튤립 뿌리 하나의 가격이 고급 주택 한 채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2013년 가을 비트코인 가격이 몇 주 만에 100배 이상 상승하자, 네덜란드 중앙은행의 누트 웰링크는 “옛날에는 투기로 망해도 튤립 뿌리 하나는 손바닥에 남았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2017년에 개봉된 영화 ‘튤립 피버’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 소피아, 늙고 부유한 남편 코르넬리스 그리고 매력적인 화가 얀의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튤립 투기와 집단적 광기에 빠진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이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재현한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속과 생활상은 튤립 마니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1990년대 일본에서 부동산 거품이 붕괴하면서 일본 경제가 쇠락하게 된 것처럼, 1630년대 튤립 거품의 붕괴는 네덜란드의 황금기라고 알려진 위대한 시기를 저물게 했다. 황금기의 네덜란드는 예술에서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유럽 최강의 지위를 누렸다. 이 시대의 네덜란드는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곳이었고, 로크가 정치적 망명지로 선택한 곳이었으며, 유리 세공사로 연명하던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쓴 곳이었다. 이후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튤립 광풍과 유사한 ‘집단적 투기’가 뒤따랐고 결국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남해 버블

18세기 영국에서는 남해 거품(South Sea Bubble)으로 알려진 집단적 투기 광풍이 불었다. 이 모든 것은 1711년 영국 의회가 설립한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에서 시작됐다. 이 회사는 아메리카 무역을 활성화하고, 영국 왕실의 국가 부채를 줄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민관 합작 형태의 주식회사였다.

1713년 영국 의회는 남해회사에 아메리카 지역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고, 아시엔토(asiento), 즉 아프리카 노예를 스페인 제국에 판매하는 노예무역을 허용했다. 영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4)에 참가해 지중해의 요충지인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획득했고 스페인으로부터 아메리카 무역에 대한 양보를 얻어냈다. 따라서 사람들은 아메리카 무역, 특히 노예무역을 통해 남해회사의 이익이 극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설립 당시 남해회사는 최초 주식 매입자들에게 6%의 이자를 덤으로 지급하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체결로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가 회복됐지만 영국인이 예상했던 무역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페인은 영국에 제한된 양의 무역만을 허용했고 심지어 이익의 일부를 가져갔다. 스페인은 노예무역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고, 일반 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영국 선박의 수도 엄격히 제한했다. 나중에는 1년에 한 척밖에 보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것은 남해회사가 계속 기업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폰지 게임

존망의 기로에 선 남해회사는 왕실을 끌어들였다. 1718년 영국 국왕이 남해회사의 후원자임을 공표한 것이다. 군주제 국가에서 국왕의 지지만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해회사는 신주 발행을 통해 주식 물량을 더욱 부풀렸다. 이번에는 액면가의 100%를 이자로 돌려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사가 거의 수익을 내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주식 거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회사가 살아남는 길은 자신의 주식을 점점 더 많이 거래하는 것뿐이었다. 회사 관계자들은 주식 가격을 더욱 부풀렸고, 주변의 친구나 친척들에게 주식 구매를 권유했으며,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주식을 뇌물을 주기 시작했다.

1720년 영국 의회는 남해회사가 국가 부채(국채)를 인수하도록 허용했다. 남해회사는 3200만파운드의 국가 부채를 77%나 할인된 가격인 750만파운드에 매입했다. 이제 남해회사는 무역 회사에서 투자은행으로 사실상 업종이 바뀐 것이다. 남해회사의 새로운 전략은 신주를 발행해 주식 판매로 얻은 돈으로 국가 부채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곧 ‘주식(신주)’과 ‘국가 부채 이자’를 직접 교환하는 것이 보다 편리한 방법임을 알게 됐다. 스와프(swap)를 생각해 낸 것이다. 남해회사의 업종 전환은 영란은행(BOE)에도 위기감을 심어줬다. 남해회사가 국가 부채를 쌓아두고 주식을 팔았다면, 영란은행은 국가 부채를 쌓아두고 은행권을 팔았기 때문이다.

주식은 불티나듯 팔렸고, 대중은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1720년 8월 주가는 종전의 10배 수준으로 폭등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새로운 돈이 계속 유입되지 않으면 한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리고 결국 터져버리는 폰지 사기(Ponzi scheme)와 같은 것이었다. 대외무역은 실현되지 않았고, 회사는 주식 대금과 국가 부채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20년 9월 거품이 터졌고 3개월 후 주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자자들은 파산했고 성난 군중은 해명을 요구하며 거리에 불을 질렀다.

범인은 주식회사

영국 하원에서 국정조사가 열렸다. 천문학적 규모의 부패와 뇌물 수수가 드러나자, 금융 스캔들이 부패 스캔들로 변했다. 의회는 자신의 혐의를 줄이기 위해 교활한 윌리엄 월 폴을 구원투수로 투입했다. 1720년 월 폴의 일사불란한 주도하에 영국 의회는 거품법(Bubble Act)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법은 ‘왕실의 특허 없이는 주식회사를 설립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관련자 처벌도 피해자 구제도 없었다. 이제 모든 죄악은 남해회사나 부패한 귀족, 정치인들이 아니라 ‘주식회사’가 저지른 것이 됐다. 더 놀라운 일은 남해회사가 1853년까지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18세기 초반의 버블 기간 영국에서는 200여 개의 ‘버블 회사’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전망이 그럴듯해 보이는 회사가 설립되면, 그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선뜻 주주로 참여했다. 어떤 사람은 영원히 운동하는 바퀴를 만드는 회사를 설립했고, 또 어떤 사람은 납에서 은을 추출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물론 이러한 회사에 투자한 사람들은 모두 망했다. 오늘날 미국 벤처캐피털 업계의 속설에 따르면 20~30개 벤처회사 중에서 살아남는 회사는 1개 사뿐이라고 한다.

뉴턴의 탄식

금본위제하에서 화폐는 금의 물리적 수량에 상응하는 고정된 가치를 가질 수 있었지만, 미래의 성장이 불확실한 회사의 주식은 그러한 가치를 가질 수 없었다. 당시에는 주식 투자가 불확실한 미래의 전망에 근거한 도박에 가까웠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도 남해 거품의 희생자였다. 호사가들에 따르면 뉴턴이 남해 버블로 인해 입은 경제적 손실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4000만파운드(약 66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천재 수학자였던 뉴턴 자신도 대중을 압도하는 집단적 조증이나 히스테리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뉴턴은 전 재산을 잃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별과 달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었지만,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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