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학수의 골프 오디세이 <149> 세계 최강 한국여자골프의 추락 ③] ‘돈’보다 ‘꿈’을 좇는 일본 야구 장인(匠人)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정상급 선수는 연 20억~30억원의 수입을 올린다. 모자와 상의 가슴에 로고를 새기는 메인 스폰서 계약을 통해 연간 8억~10억원, 모자의 측면과 상의의 측면 등에 로고를 다는 다양한 형태의 서브 후원 계약으로도 건당 1억~2억원씩을 받는다. 여기에 상금으로 연간 10억~15억원을 추가할 수 있다.
지난해 상금 순위 1위였던 박민지는 14억7792만원을 기록했고, 2위 김수지는 10억8258만원이었다. 돈만 생각한다면 굳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 진출할 이유가 없다. 지난해 한국 선수 중 LPGA투어 상금 순위가 가장 높았던 선수는 전인지로 267만3860달러(3위)였다. 최혜진은 207만5696달러(6위)를 받았다. 이들처럼 좋은 성적을 낸다면 미국에서 버는 돈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체류를 위한 비용과 장거리 이동, 피로도 등을 생각하면 한국에 머무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최고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 올림픽 금메달을 따겠다는 꿈 등을 생각하면 더 큰 무대에 도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성적을 올려도 올림픽에 나갈 세계 랭킹을 획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세계 무대에서 오랫동안 기술적 우위를 지키고 있던 일본 전자 업계에서 내수 시장에 안주하면서 혁신을 이루지 못하는 이른바 ‘갈라파고스화(化)’가 진행되는 시점에 일본 야구는 반대로 MLB(미국 메이저리그)를 향한 도전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내수 시장 안주한 日 전자 업계, 야구는 MLB 향해 도전
1995년 이전까지 MLB 무대를 밟은 일본 야구 선수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이런 흐름은 1995년 노모 히데오(55)가 LA 다저스에 입단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노모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MLB로 가기 위해서는 10시즌 동안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5시즌 동안 소속 팀 긴테스 버펄로스에서 활약하고 MLB 진출을 위해 은퇴를 선언하는 과감한 결단을 했다. 그의 이 같은 도전 정신은 다른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새로운 자극제가 됐다. 이미 1990년 긴테스 버펄로스 입단 첫해에 신인왕과 MVP는 물론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가 받는 사와무라상(償)까지 휩쓸었던 노모는 MLB 무대에서도 신인왕을 수상하는 등 뛰어난 실력을 과시했다. 그의 성공 사례는 1999년까지 7명의 일본 선수가 그를 뒤 따라 MLB에 문을 두드리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스즈키 이치로(50)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치로는 MLB에 진출한 최초의 일본인 타자다. 그가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했던 2001년까지 MLB에 진출했던 일본인 선수들은 모두 투수였다. 이치로는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에서 7년 연속 타격왕을 했던 최고의 타자였다. 하지만 과연 이치로가 구속도 빠르고 변화구의 낙차도 큰 최상급의 투수들이 즐비한 MLB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1996년 미국 프로야구 올스타 팀과 일본 올스타 팀 간의 경기가 펼쳐졌을 때 이치로는 충격에 빠졌다. MLB 타자들은 구종을 가리지 않고 초구부터 자신이 예측한 것과 비슷하게 공이 들어오면 풀 스윙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타자들의 적극성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찾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치로는 오히려 이런 MLB의 공격적인 타격 문화의 빈틈을 자신만의 장점으로 극복했다. 핵심은 좋은 공만을 노려 칠 수 있는 선구안이었다. 동체 시력이 탁월한 이치로는 구종이나 코스를 예측해 노려 치는 타격을 하는 것보다 투수가 던지는 스트라이크를 정확하게 쳐내는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이 결과 이치로는 1999년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70%의 공을 자신이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이는 2년 뒤 MLB 진출로 이어졌다. 세계 최고 수준의 MLB에서 최고가 되기 위한 꿈을 이루기 위해 이치로는 치밀한 준비를 했다. 그는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기 전, MLB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 2년 연속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2001년 시범 경기 때 두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일본 투수에 비해 MLB 투수들은 투구 동작이 빠르고 간결해 이치로의 전매특허였던 ‘시계추 타법’이 무용지물이었다. 왼손 타자인 그는 왼발을 고정한 채 오른발을 움직이며 타격 기회를 잡는 ‘시계추 타법’을 곧바로 버리고 간결한 타격 폼을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일본과 다른 MLB의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이치로는 MLB가 일본보다 아웃 코스 스트라이크 존이 공 한 개 정도 넓다는 점을 발견했다. 정교한 타격이 최대 장점인 그는 이때부터 아웃 코스 공을 공략하는 데 집중하며 좌익수 쪽 안타를 많이 만들어 냈다.
‘타격의 장인(匠人)’다운 이치로의 미국 프로야구 적응 과정은 그가 2004년 MLB 한 시즌 안타 신기록을 세우는 원동력이 됐다. 84년 동안 유지됐던 이 기록을 달성하는 동안 이치로는 자신이 친 안타를 분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비수에게 잡힌 범타(凡打)마저 세밀하게 분석해 이후 경기에 활용했다. 기록상으로 범타는 모두 아웃으로 처리된 타구이지만 그 퀄리티가 다르다는 점을 이치로는 놓치지 않았다. 정확한 타이밍에서 맞은 범타는 오히려 빗맞은 안타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기 때문이었다.
이치로, 84년 만의 최다 안타 신기록…오타니, MLB 첫 ‘10승·40홈런’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기 위해 그는 항상 똑같은 루틴을 유지했다. 그는 매일 아침 같은 음식을 먹고 TV를 시청할 때도 시력 유지를 위해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기 시작 5시간 전에 경기장에 들어가 같은 방식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타격 준비 자세도 늘 같았다. 심지어 그는 더그아웃에 있을 때 ‘발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다’는 판단하에 나무 막대기로 발바닥을 항상 문질렀다. 야구에 진심이었던 이치로의 완벽주의는 쉼표가 없었다. 이는 그가 홈런 천국 MLB에서 단타의 미학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일본 야구의 MLB 도전의 역사는 투수에서 타자로 그리고 단타 위주의 ‘스몰 볼(작전 위주 야구)’에서 홈런이 중심이 된 ‘빅 볼’로 발전해 왔다.
2018년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LA 에인절스에 입단한 오타니 쇼헤이(29)가 현대 야구에서 매우 희귀한 투타 겸업(이도류·二刀流) 선수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타니는 신인왕, 리그 MVP를 수상하는 등 이미 MLB 무대에서 최고의 선수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그를 진정으로 특별하게 만든 것은 단일 시즌에 투수로 10승, 타자로 40홈런을 기록한 일이다. 아직 2023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달성한 이 오타니의 기록은 154년 MLB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지금까지 MLB에서 한 경기 이상 활약한 일본인 선수는 모두 6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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