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86>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속물 변호사가 악마 같은 의뢰인을 만났을 때
모든 범죄자는 악(惡)이다, 검사는 생각한다. 대다수의 범죄자는 약한 인간일 뿐이다. 변호사 마이클 할러(이하 미키)는 생각한다. 그는 링컨 차를 타고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길 위의 변호사다. 근사한 사무실에서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서류를 뒤적일 시간이 없다. 그의 고객이 마약, 매춘, 폭행을 일삼는 뒷골목 잡범들이기 때문이다.
‘쓰레기들을 변호하고 밤에 잠이 오냐’며 세상은 손가락질하지만 미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이 쓰레기라 한들 세상엔 고상한 척, 더 고약한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유죄라 한들 점잖은 척, 더 끔찍한 괴물들은 세상을 얼마나 흉하게 망쳐 놓는가. 없는 죄를 만들어 죄인을 만드는 검사도 있다. 미키도 재판에 도움이 될 만한 법원의 하급 직원이나 경찰에게 뇌물을 준다.
인간이란 발가벗겨지기 전까지만 고상하다. 법치국가에서는 체포되기 전까지만 선량하다. 법, 그 자신이 ‘거대한 괴물’일지 모른다. 그래도 법은 인간쓰레기조차 변호받을 권리를 보장한다. 증거에 따라 피의자를 범인이라 확신하는 것이 검찰의 역할이듯, 의뢰인이 무죄라 믿고 변론하는 것이 변호사의 의무다. 단, 선입금 후변호, 입금하지 않으면 변호도 없다. 미키는 말한다. 죄지은 자들아, 내게로 오라. 돈다발을 들고!
그런 미키에게 거액의 수임료를 받을 수 있는 사건이 들어온다. 술집에서 만난 여자를 폭행한 혐의로 체포된 부동산 거부의 아들 루이스가 변호를 의뢰한 것이다. 검찰은 폭행과 강간 미수죄로 기소했지만, 루이스는 여자가 돈을 목적으로 유혹, 자작극을 벌여 함정에 빠뜨린 거라며 무죄를 주장한다.
가족의 전담 변호사가 있는데도 루이스가 콕 집어 자신을 선임한 것이 미키는 꺼림칙하다. 하지만 큰돈을 벌어들일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다. 그는 변호를 맡는다. 100만달러(약 13억원)를 예치한 뒤 도주 방지 추적 장치를 발목에 차고 보석된 루이스는 완전한 자유를 하루라도 빨리 누리고 싶다며 재판을 신속히 끝내라고 주문한다.
미키는 사건 정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루이스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의심이 한 번 파고들자, 과거에 맡았던 사건과 비슷한 정황, 동일한 수법의 범죄가 떠오른다. 당시 사건의 피해자는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마르티네즈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미키는 믿지 않았다. 진범을 가리키는 증거들도 묵살했다. 사형당하기 싫으면 죄를 인정하고 검찰의 협상안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 감옥에서 15년을 살게 해놓고 전기의자에서 의뢰인을 구했다고 미키는 자위했다.
무고한 의뢰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잡범을 풀어주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라고 미키는 믿고 있었다. 악몽이 현실이 된 게 분명했다. 그는 지옥 같은 감옥을 견디고 있는 마르티네즈를 찾아간다. 그때는 믿어주지도 않더니 왜 찾아왔냐는 원망을 들으면서도 미키는 사건을 바로잡고 싶다며 루이스의 사진을 보여준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죄 없는 사람은 인생을 빼앗겼는데 살인범은 죄책감도 없이 자유를 만끽하며 또다시 범행을 저질렀다. 피해자의 반격으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아쉬워할 뿐이다. 루이스는 자기 대신 마르티네즈를 감옥에 넣은 ‘멍청한’ 변호사를 이용해 법의 그물을 또 한 번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다음엔 살인과 강간을 반드시 성공시킬 터였다.
모든 범인이 악인은 아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악, 그 자체’였다. 미키가 상황을 파악했다는 걸 알자, 루이스는 숨기거나 변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죄를 그리운 추억인 듯 묘사한다. 그래도 폭로하지 못할 거라며 미키를 비웃는다. 고발할 생각이라면 이혼한 아내와 어린 딸의 안전을 생각하라고 협박한다.
다음 날, 미키의 오랜 친구이자 조사원이었던 전직 경찰 프랭크가 시체로 발견된다. 미키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주저앉을 것처럼 무릎이 떨린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비밀을 발설할 수 없다. 의뢰인을 고발할 수도 없다. 검찰에 알려도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 변호사 자격만 박탈될 것이다. 변호사의 비밀 유지 특권, 루이스가 미키를 선임한 이유였다.
루이스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프랭크의 죽음을 애도하며 미키의 목에 건 올가미를 더 세게 조인다. 미키는 주먹이라도 휘두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저 악마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잘못된 모든 일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그런데 궁금하다. 루이스는 발목에 찬 추적 장치를 어떻게 풀고 프랭크를 죽였을까? 청부살인을 한 것일까?
귀공자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루이스가 법정에 선다. 천사 같은 얼굴과 순수해 보이는 눈빛으로 배심원과 판사 앞에서 “나에겐 죄가 없다. 난 너무 억울하다”며 호소한다. 미키의 창자가 뒤틀린다. 하지만 미키는 최고의 변론으로 루이스에게 무죄 판결을 선물해야 한다.
굴복한 것은 아니다. 정의나 진실보다 돈을 좇으며 살았지만, 악마의 노예가 될 생각은 없다. 냉정하게 계산하고 있을 뿐이다. 루이스가 법을 이용해 자신을 조종하는 것처럼, 미키도 법을 이용해 그의 죄를 밝히겠다고 다짐한다. 안전한 세상을 위해, 억울하게 누명 쓰고 감옥에 있는 마르티네즈를 위해, 변호사란 직업을 잃지 않기 위해. 무엇보다 사랑하는 딸을 지켜야 한다.
마이클 코넬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브래드 퍼맨 감독이 2011년에 발표한 영화다. ‘타임 투 킬’에서 변호사 역을 맡아 세계적인 스타가 된 매튜 맥커너히가 미키를 연기했다.
세상엔 악마가 산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근사하게 웃으며 같이 놀자고 유혹한다. 거부하면 ‘너에게 고통을 주겠다’며 겁을 준다. 그들이 원하는 건 무고한 생명에게 고통을 주고 기쁨을 얻는 것이다.
사람의 길과 악마의 노예로 사는 길 앞에서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악마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칠 수 있는 지혜와 힘은 사람의 길을 선택한 용기, 그다음에 솟아난다. 그렇게 다시 일상이 시작된다. 적당히 거짓말하고 조금은 나쁜 짓도 하면서 울고 웃는 우리들의 소중하고 평범한 인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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