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알퍼의 영국통신] 영원한 적은 없다

2023. 9. 2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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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영국 식민지·전쟁 거치며
프랑스·독일과 앙숙 관계 형성
시간 지나 미운 감정 희미해져
반일감정 줄어드는 韓 떠올라

최근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정치지도자들의 노력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내가 한국에 거주했을 당시만 해도 곳곳에서 팽배한 반일 감정이 느껴졌는데 아마 여기에는 미국의 입김이 작용한 듯하다.

이 상황은 여러모로 오랜 정치적 앙숙인 프랑스, 독일과 함께 정치적 연대를 도모하고자 영국이 유럽연합(EU)에 속해 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은 EU의 리더 격인 프랑스와 독일이 무시하기에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지만 EU와 어우러지기에는 다소 어색한 존재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관계는 수세기 동안 지속됐다. 두 나라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서로 식민지 영토 크기로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독일과 경쟁의 역사는 훨씬 짧긴 하지만 그 강도는 훨씬 깊다. 20세기 초 독일이 유럽의 새로운 파워로 급부상하면서 영국은 오랜 숙적인 프랑스와 힘을 합쳐 독일을 상대로 엄청난 규모의 전쟁을 두 번 치렀다.

그리고 20세기의 나머지 기간에 영국인들은 경멸, 두려움 그리고 승리가 뒤섞인 감정으로 독일인들을 바라보았다. 축구 경기에서 영국 팬들은 독일에 대한 영국의 승리를 언급하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 번의 월드컵"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독일 팬들을 조롱했다. 1999년까지만 해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바이에른 뮌헨을 물리치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승리하자 맨유 팬뿐만이 아니라 영국 전체가 환호했다.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에 무자비한 패배를 안겼던 독일 선수들이 경기 종료와 함께 경기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잉글랜드 팀의 승리만큼 달콤했다.

하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는 아직도 독일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지만, 젊은이들 생각은 그렇치 않다. 영국 아이들 역시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한 역사를 배우지만, 그들에 대한 적개심은 이제 영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 독일인들은 강박적인 시간관념과 따분한 성격, 수비 위주의 지루한 축구로 조롱을 당했다. 또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의 마늘 냄새, 지나친 흡연, 부도덕함과 성적인 문란함을 비웃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독일 기차 시간 또한 말썽을 부리며 유머와 개성을 겸비한 독일 셀럽들이 영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독일 축구도 공격형 축구로 변모해 현재 프리미어리그(EPL)에서 가장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감독들 모두가 독일 출신이다. 프랑스인에 대한 고정관념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영국 요리에 더 많은 마늘이 사용되고 프랑스의 흡연율은 줄어들고 있으며 부도덕함과 성적인 문란함은 영국에도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오래된 적대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랜 고정관념 또한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독일, 프랑스와의 축구 경기에 열광하지만, 더 이상 그 이유를 기억하지 못한다. 언론에서도 우리의 적은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있다고 떠들어댄다. 2023년에 두 나라를 미워하는 것은 진부하게 느껴진다. 영국인들은 이제 새로운 증오의 대상을 찾아야 할 듯하다.

[팀 알퍼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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