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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매경춘추] 외화내빈의 교육

입력 : 
2023-09-25 17:32:34
수정 : 
2023-09-25 17:4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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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MIT의 15대 총장 찰스 베스트 박사는 1990년부터 14년간 재임하였다. 유학 시절 교분이 있어, 베스트 총장이 퇴임 직후 가진 인터뷰 기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총장 재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업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베스트 총장은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MIT 모든 강의록을 무료로 공개한 오픈코스웨어(OCW)를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은 것이다. MIT 역사상 세 번째로 오래 재임한 총장인데, 한낱 강의록 공개가 최대 업적이라니. 나는 당연히 MIT 캠퍼스에 큰 건물을 짓고 새로운 연구 조직을 만든 것을 얘기할 줄 알았다.

우리는 어떨까? 많은 대학에서는 구성원들이 투표로 4년마다 총장을 선출한다. 선거에서 표를 얻어야 하니, 구성원 일부라도 반대하는 개혁은 추진하기 어렵다. 총장들이 업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주로 건물을 지었거나 조직을 새로 만들었거나 하는,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이다. 유권자들의 만족을 얻어내려면 하드웨어를 키워 나누어주는 것이 가장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교육을 혁신하며 학생들의 성취를 극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다. 만약 베스트 총장의 OCW 사업을 우리네 대학에서 추진했다면? "강의록을 공개하라니!" 교수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총장직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설령 천신만고 끝에 추진했다 하더라도 큰 인정을 받기 어렵다. 시스템 혁신 같은 '소프트웨어' 개선은 가시적이지 않고 효과를 느끼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리 생색도 나지 않는 일에 4년 임기 동안 전력투구할 총장은 많지 않다.

우리 동네에는 네거리를 사이에 두고 초·중·고교가 각각 하나씩 있다. 최근 이들 학교 교문 위에 전광판이 설치되었는데 한밤중에도 불을 밝히고 있다. 중앙정부 세수에 연동되어 지급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 급격히 늘었다는데, 남는 교부금으로 저런 전광판까지 설치하는 게 아닌가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밤새 불을 밝히니, 전력요금도 상당할 텐데…. 코로나 이전에도 온라인 교육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하지만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가 얼마나 온라인 교육 조류에 허술하게 대비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건물 고치고 전광판 설치하는 것처럼 눈에 띄는 하드웨어에는 열심이었지만 정작 꼭 필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 개선에는 눈감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 학생들을 20세기 교수(교사)가 19세기 교실에서 가르친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교육시스템을 뜻하는 '교실'을 진짜로 교실 그 자체로 착각하고 있는 우를 도처에서 목격한다.

베스트 총장의 인터뷰 기사를 본 후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그의 혜안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소박하게(?) 시작된 OCW 프로그램이 곧이어 온라인 강의 플랫폼인 에드엑스(edX)로 발전하며 교육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 많은 산유국들을 선진국으로 여기지 않듯이, 선진국이 되려면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하드웨어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선진국은 내부의 탄탄한 시스템 소프트웨어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우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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