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어느 30대 과학자의 넋두리

송복규 기자 2023. 9. 2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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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예산 깎인 거 있잖아. 그거 때문에 고민이 많아."

얼마 전 23년 지기인 한 친구와 오랜 만에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다.

친구는 가난한 건 아니지만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공부를 이어왔다.

가족이 있는 한국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할 계획이었지만 이번 예산 삭감으로 갈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들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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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예산 깎인 거 있잖아. 그거 때문에 고민이 많아.”

얼마 전 23년 지기인 한 친구와 오랜 만에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다. 이 친구는 12년 동안 뇌 과학을 공부한 끝에 지난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제 박사가 됐으니 사람 노릇 좀 하겠다는 농담을 건네자 친구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엔 한국에서 연구해도 괜찮겠다는 희망이 있었어. 근데 예산이 삭감되면서 갈 곳이 없더라고. 그렇다고 꾸역꾸역 취업하자니 기초과학인 뇌 과학자는 대기업들이 관심도 없고. 12년이나 공부해서 박사가 됐는데 돈을 생각 안 할 수도 없고.”

친구는 가난한 건 아니지만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공부를 이어왔다. 자신이 생활할 정도의 돈만 벌면서 연구실에서 실험하고 논문을 썼다. 얼마 전 받은 박사학위는 부모님의 기대와 지인들의 관심, 그리고 자신의 인내로 만든 산물이다.

어렵게 박사가 됐지만 뜬금없이 R&D 예산을 깎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은 연구에 사용할 사업비가 20~30% 삭감됐다. 친구가 속한 대학의 연구실도 내년에 신규 과제를 따는 걸 포기했다고 한다. 뇌 과학은 기초과학 분야인 만큼 예산 삭감의 타격도 심했다. 친구는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이어갔다. 가족이 있는 한국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할 계획이었지만 이번 예산 삭감으로 갈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들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출연연이나 대학이나 다 힘든데 누가 갓 박사를 딴 연구원을 받아주겠어. 우리 연구실만 해도 잘하는 후배들 많은데 차리리 박사 과정생 시키는 게 낫지. 차라리 해외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녹록지는 않지만 최후의 카드야.”

친구는 말하다 흥분했는지 한국이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고 얘기했다. 자신처럼 박사들이 한 번 나가서 해외에 정착해버리면 큰 뜻이 있지 않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특정 분야를 10년 넘게 연구한 고급 인재가 해외로 유출되는 건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 따고 일자리가 없어서 해외로 나간 사람들은 한국이 과학을 대하는 태도가 앞으로도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요즘 국제협력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사실상 이건 해외유출이나 다름없어. 결국, 우리 과학계가 망하는 길로 가는 거지.”

친구와 술자리를 마치고 다음날 노벨상 수상자 5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열린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 서울 2023′ 행사를 갔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을 줄이는 건 천연자원 없이 인재에 투자해야 하는 한국에게 잘못된 선택이라고 입을 모아 지적했다. 그런데 행사의 축사를 맡은 조성경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 차관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 과학계는 혁명적인 변화와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는 혁신적인 시스템과 담대한 시스템으로 연구자들이 도전적인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장려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을 떠나겠다는 친구의 말과 연구자들이 도전 정신을 가질 수 있게 돕겠다는 조성경 차관의 말이 비교됐다.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한국이 싫어서’가 곧 개봉한다고 한다. 이른바 헬조선이 된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에서 행복을 찾은 20대 여성의 이야기다. 머지않아 ‘한국이 싫어서2′가 나온다면 주인공은 ‘2030′ 청년 과학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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