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정부 '고용평등상담실 폐지'에 절규하는 이들 "피해자 고통 알아달라"

입력 2023. 9. 25. 17: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동부 "실효성" 주장하지만 … 전국 8개 지청 상담창구로 '연 1만 건' 상담 소화하겠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20대 여성 직장인 A씨는 지난해 6월 회사 대표이사에게 성추행 당했다.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고 경찰에도 사건을 신고했지만, 이후로 오히려 지옥 같은 시간이 펼쳐졌다. 도움이 될 줄 알았던 '공적시스템'은 A씨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가해자·피해자 분리조치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 직장에선 대표이사의 2차 가해가 시작됐다.

몇 달 만에 살이 급격히 빠지고, 잦은 두통으로 현기증이 나 일상 자체가 버겁게 느껴졌다. A씨는 "삶의 의욕이 현저하게 떨어졌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회사의 대표와 일개직원, 이 '게임이 안 되는' 분쟁구도 속에서 사건을 맡은 국선변호사조차 A씨 변호를 포기했다. 법률자문도 없이 방치된 A씨에게 동아줄이 되어준 곳이 '고용평등상담실'이었다.

고용평등상담실은 고용노동부의 예산 지원 아래 운영되는 민간 여성노동 상담창구다. 지난 2000년 시작돼 현재 전국 19개 상담소가 운영되고 있다. 상담실을 찾는 내담자들이 대부분 A씨와 같이 '어디서도 도움을 얻지 못하는' 직장 내 괴롭힘, 성폭력 및 성차별 피해자들이라, 관계자들 사이에선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 꼽힌다. A씨 또한 "(상담실의) 지속적인 상담과 정서적 지지 속에서 지금은 일자리를 다시 구해 건강한 일상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고 말한다.

25일 오전, A씨는 국회 앞 기자회견장으로 편지를 보내 "고통받는 피해자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말아달라"며 "상담실 사업을 축소하거나 없애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4년 예산안에서 고용평등상담실 운영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날 국회 앞에선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와 이들을 지지하는 190여개 시민단체들의 고용노동부 규탄 기자회견이 개최됐다.

이들 설명에 따르면 노동부는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에서 올해 12억여 원 규모였던 예산을 내년 5억여 원으로 절반 이상(54.7%) 삭감했다. 노동부는 또한 현행 '고용평등상담실 운영' 예산으로 잡혀있는 해당 예산을 '고용평등상담지원' 예산으로 바꿨다.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에 대한 지원은 없애고, 전국 8개 고용노동부 지청에서 고용평등상담 담당자 1인을 채용하여 상담지원을 직접 운영하겠다고도 밝혔다.

이날 국회 앞에 모인 상담실 현장의 관계자들은 노동부가 이미 "상담원에게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만 지급할 수 있는 초저예산을 지급해왔다"라며 "(이번 예산삭감은)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모두 놓아버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동법의 '사각지대'인 초단시간 노동자 등이 급증하고, 특히 시간제 '여성' 노동자의 비율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 이 같은 예산삭감은 성폭력·성차별 등으로 인해 대표적인 취약노동자로 꼽히는 여성노동자들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00년부터 2022년까지 고용평등상담실에 쌓인 상담 건수는 총 16만 8070건으로, 상담실 등은 연 12억 원 규모의 예산지원만으로 연평균 7640건의 상담을 지난 24년간 지속해왔다. 특히 상담건수가 2020년 1만 1328건, 2021년 1만 1892건, 2022년 1만 3198건으로 꾸준히 늘면서 '예산 삭감보다는 확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계속돼 오기도 했다.

▲25일 오전 서울 국회 앞에서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와 19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24년간 여성노동자를 지켜온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퇴행하는 고용노동부 규탄한다'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프레시안(한예섭)

8명으로 연 1만 건 넘는 상담 소화? 노동부의 이상한 '실효성' 주장

노동부는 고용평등 상담지원의 '실효성'을 예산삭감 및 운영방식 변경 등의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별도의 고용평등 상담 창구 운영으로 상담과 근로감독의 유기적 연계, 협업 활성화를 촉진하고 피해자 권리구제의 실효성을 제고"한다는 설명이다. 현장에선 물음표가 붙는다. 예산과 창구의 절댓값을 줄이면서도 실효성은 높이겠다는 식의 설명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전여민회의 김예주 상담활동가는 "19개의 상담 창구를 8개로 줄이면서 피해 권리 구제 실효성을 제고한다니 (말이 되는가)"라며 "(현장에서) 피해자를 위해 이루어지는 지원들을, 고용평등상담실 상담원들의 노력을 알고 있다면, 연계 협업 따위의 말로 고용평등상담실을 축소하는 기획이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 1만 건이 넘어가는 상담을 8명의 담당인원만으로 처리하겠다는 기획은 단순히 산술적으로 접근해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는 전국 19개 지역에 설치된 상담실에서 상담전문가는 물론 노동, 법률전문가 등이 함께 배치돼 종합상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신상아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장은 "(서울지역에서만) 변호사, 노무사, 전임활동가 등 19명이 상담을 지원하고 심리상담 지원 전문인력 3명이 별도로 배치돼 여성노동자의 일상회복을 돕고 있다"라며 "고작 8개 지청에서 (각 지청 당) 1명이 상담을 해 어떻게 고용평등을 실현하겠다는 건지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상담실에 찾아오는 내담자들의 특성상 '밀착상담', '장기상담'이 요구된다는 점도 큰 문제다. 신 회장은 "고용평등상담실은 기계적인 정보전달 창구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종합상담실"이라며 "(상담실 직원들은) 수십 차례의 상담, 의견서 작성, 경찰조사나 재판부 출석 등에 피해자 동행까지 병행하며 함께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한) 대응방법을 모색하고 스스로가 문제해결 주체로 성장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2022년 서울여성노동자회 고용평등상담실의 전체 상담건수 1140건 중 신규상담은 564건, 재상담은 566건으로 재상담의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내담자들은 대부분 어디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다가 상담실을 찾아온 이들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접근과 신뢰관계 형성은 상담실의 주요업무로 작용한다. 노동부의 8개 지청 통합관리로는 이 같은 운영이 힘들어질 수있다.

더군다나 해당 8개 지청은 모두 노동부의 공식 창구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상담실을 찾아가기가 힘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들 중에선 A씨와 같이 고용노동부, 지역노동청 등 공식기관에 진정을 접수했을 때 오히려 회사 내 2차 피해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민간기관으로 운영된 고용평등상담실이 노동자들의 최후의 보루로 작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민문장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노동부의 계획으로는) 공적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거나, 계속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사각지대의 여성노동자 문제에 대처할 수 없다"라며 "끊임없이 사각지대를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야하고, 공적시스템이 독주하고나 안주하지 않게 평가,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그 역할을 해온 곳이 바로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이라고 설명했다.

박은진 전북여성노동자회 상담활동가는 "불이익과 억울한 일을 당해도 회사에서 잘릴까봐 참는 노동자들이 많다. (그들과) 울고 웃으며 상담하다보면 어떤 노동자들에겐 실질적인 해결도 해결이지만 내 피해를 '하소연할 수 있는 자리'도 굉장히 중요하단 걸 알게 된다"라며 "오로지 노동자의 입장에서 상담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고용평등상담실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라고 지적했다.

▲25일 오전 서울 국회 앞에서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와 19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24년간 여성노동자를 지켜온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퇴행하는 고용노동부 규탄한다'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프레시안(한예섭)

이날 기자회견 현장엔 A씨 말고도 두 명의 직장 내 성차별·성폭력 피해자들이 고용평등상담실 축소·폐지를 철회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1년간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다 퇴사 후 상담실을 찾았다는 B씨는 "얼굴이 알려지면 2차 피해로 인해 심리적으로 힘들고 취업은 더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 관에서 운영하는 상담실을 찾아가라(는 건 말이 안 된다)"라며 "(고용평등상담실을 유지해서) 저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이 언제든 쉽게 부담 없이 찾아가서 안전하게 상담받을 수 있게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 이후 회사 '핫라인' 신고를 했지만 어떤 보호조치도 받지 못했다"고 밝힌 C씨는 "퇴사하기 전 고용노동부, 국민신문고에 동료들의 진술을 모아 신고했지만 '증언은 증거가 안 된다', '회사가 이미 조치했다'라며 어떤 조치도 없었다"라며 "고용평등상담실이 없었다면 저는 억울하고 답답한 채로 일자리도 잃고 권리구제도 받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전국고용평등상담실 네트워크는 이날 "정부는 지금 거의 모든 공공인프라를 삭제하고 있다. 고용평등상담실 예산과 함께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 예산 역시 삭감했다"라며 "사실상 국가의 기능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들은 "행정부가 기능을 상실했다면 국회가 되돌려 놓아야 한다. 국회가 여성노동자가 안전하게 노동하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요청한다"고 호소했다.

▲25일 오전 서울 국회 앞에서 전국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와 19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24년간 여성노동자를 지켜온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퇴행하는 고용노동부 규탄한다'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프레시안(한예섭)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