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표방했지만 남초 집단…여성이 설 자리 잃은 ‘나 혼자 산다’ [플랫]

플랫팀 기자 2023. 9. 2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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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회차에서 남성 패널 압도적 다수…박나래만 고군분투

지난 9월1일 방송된 <나 혼자 산다>(MBC, 이하 <나혼산>) 510회에서, 샤이니의 키가 뮤직 비디오 촬영 후 집에 와서 메이크업을 지우고 머리를 감는다. 장면마다, 패널들(무지개 회원) 사이에서 “저렇게까지 하냐”라며 탄식이 터진다. 씻지 않고 그대로 잠드는 것의 장점을 설파하거나,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로 씻는다고 박력을 내세우기도 한다. 자막은 현장의 분위기를 “흡사 내무반”이라고 표현한다. 이날은 박나래가 건강상의 문제로 촬영에 불참해서 패널 전원이 남성이다. 키는 이후 복귀한 박나래에게 “너무 외로웠다. 다시는 아프지 말라”라고 호소한다. 패널들은 박나래의 빈자리를 “없으니까 칙칙했다”라고 표현한다. 아니 근데, 이런 장면…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러고 보니 2023년 5월 <나혼산>이 떠난 ‘무지개 10주년 패키지 여행’에서도 여성 회원은 박나래 한 명이었다. 원년 멤버인 김광규부터 합류 1년 차의 코쿤까지 역사와 캐릭터를 반영한 조합이었음에도. <나 혼자 산다>라며? 무지개라며? 어째서 <나혼산>의 무지개 색깔은 남(男)색인 걸까?

거의 유일하게 남은 여성 멤버 박나래가 건강상 문제로 촬영에 불참한 날, <나 혼자 산다>의 패널은 전원 남성으로 채워졌다. 제작진은 “내무반 같다”는 자막까지 달았다. MBC 제공

시기별로 짧게 성비가 반반이었던 적도 있지만, 무지개 모임은 전통적으로 남초 집단이었다. <나혼산>에서 여성 연예인이 고정 멤버로 자리잡기 힘든 이유를 파헤쳐보자. 먼저, 관찰 예능에서 일상이 구성되는 방식. 시청자는 ‘기존의 보던 것과 다른’, 그러니까 연출된 연예인으로서의 상과 차별화된 무언가를 원한다. 일상을 공개한다는 것은 곧 시청자와 친밀감을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연예인이 민낯을 드러내며 시작하는 <나혼산>의 시그니처 오프닝은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보여준다. 화려하면서도 모던한 디자인처럼 상충되는 요구가 관찰 예능에 흐른다. 최대한 자연스러우면서 재미있을 것. 세계적인 슈퍼모델인 한혜진이 <나혼산>에서 ‘달심’이라는 캐릭터를 얻고 예능에서의 입지를 다진 사례처럼, 연예인들은 일상 공개를 통해 의외의 허술하고 하찮은 면을 드러낸다. 그런데 일상적인 모습에서 시청자의 호감을 얻고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은 의외로 난도가 높은 작업이며, 특히 여성 연예인에게 불리하다.

‘허술’에서 ‘섬세’까지, 캐릭터 구축도 일방적으로 여성에 불리

<나혼산>은 앞서 키를 공격했던 것처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다소 허술하고 지저분’해야 인간적인 세계관이다. 식사 전후로 이를 두 번 닦는 게스트를 유난스럽다고 몰아가기도 한다. 기안84의 기이한 위생 관념이나 어지러운 살림 솜씨는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영역이지만, 이런 특징은 강력한 캐릭터로 소비되어 그를 무지개 모임의 뿌리 깊은 나무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아나운서 김대호가 기안84조차 “비위 상한다”고 표현한 위생 관념도 매력으로 소화하며 인기몰이 중이다. 물론 가끔 ‘여자 기안’이라는 소리를 듣는 여성 게스트가 출연할 때가 있다. 그러나 사실 누구도 그 경지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여성 중에도 그런 사람이 분명 있지만, 드러내지 못하고 수용되기 어렵다. 여자가 요리를 못하고 위생 관념이 없고 지저분한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로 통하기 때문이다. <나혼산>의 파일럿 프로그램 <남자가 혼자 살 때>는,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남자일 때 어설프거나 다소 지저분한 살림을 허용해주는 환경에서 나왔다. 그 어떤 여성 연예인이 육중완처럼 ‘고름 짜면서 자냐’는 소리를 듣는 누런 베개를 공개할 수 있겠는가. 일상 관찰 예능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획과 선별, 편집과 가공을 거친 결과물이다. 여성 연예인에게는 일상 공개가 좀 더 촘촘한 제약의 그물에 걸릴 수밖에 없다. 화사나 박나래는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함으로 <나혼산>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러나 전현무가 툭하면 제3의 눈을 개그 소재로 삼는 것과 달리, 화사의 노브라는 <나혼산>에 들어올 수 없으며 온갖 악플과 성희롱의 공격 대상이다. 이장우는 마음껏 먹고 마시며 행복을 찌운 ‘팜유 왕자’로 인기를 끌지만, ‘원래 예뻤던 여자’가 살 때문에 외모가 바뀐다면 용납될 수 없다.

일당백의 여성 출연자 박나래는 여성성을 지우거나 축소함으로써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MBC 제공

이러한 제약은 캐릭터의 다양성 측면에도 영향을 끼친다. 무지개 회원 중 키는 비전형적인 남성성이 본인의 고유한 캐릭터이다. 오랜 아이돌 활동의 내공을 보여주는 외모 관리, 하루에도 옷을 몇 번씩 갈아입은 패션 센스, 능숙한 집안일, 음식 하나를 먹을 때도 플레이팅을 소홀히 하지 않는 섬세함이 화제가 되었다. 코쿤 또한 다정다감한 말투와 소식하는 식습관 등이 매력 포인트다. 하지만 여성에게 이런 특징은 그다지 차별화되는 요소가 아니다. 외모 관리와 살림 솜씨, 섬세함, 다정다감한 말투는 의무이며 소식하는 식습관은 비호감의 표적이 되기 일쑤다. 많은 걸그룹 멤버와 여배우들이 ‘잘 먹는 모습’을 어필하려고 애쓰는 까닭이다. 일상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일거수일투족이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여성에게 부과되는 높은 기준을 뚫고 너무 더럽지도 않고 너무 깔끔 떨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호감을 주는 어딘가에 자리 잡기란 무척 까다롭다. 알뜰살뜰한 성격 때문에 손님맞이 음식을 조금 적게 준비했던 한 여성 연예인은 얼마나 욕을 먹었고, 독서를 좋아하고 주식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걸그룹 출신 여성 연예인은 또 얼마나 설정이라는 조롱을 들었는지.

<나혼산>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인 ‘관계성’ 또한 무지개 모임에서 여성 회원이 오래 살아남기 어려운 원인이다. ‘세·네 얼간이’ ‘기 라인’ ‘여은파’ ‘무 라인’ ‘팜유 라인’ 등이 인기를 끌었고 가장 재미있었던 회차로 꼽히는 일명 ‘레전드 에피소드’ 또한 ‘무지개 4주년 여행’ ‘LA 특집’ ‘여름 나래 학교’ ‘나래Bar 집들이’ ‘팜유 라인 베트남 세미나’처럼 무지개 회원들끼리 떠들썩하게 모였을 때 나왔다. 관계성은 함께 편집본을 보며 코멘트를 할 때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중요하다. 그런데 이성끼리의 조합은 높은 확률로 썸이나 연애 같은 핑크빛 기류로 흐른다. 남초 모임이다 보니 러브라인에 동원되지 않는 남자 멤버는 있지만, 동원되지 않는 여자 멤버는 없다. 일단 여성 게스트가 나오면 누구든지 한 번씩은 남자 회원을 들이댄다. 러브라인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잘되면 인기를 끌지만 관심이 없다는 걸 들키거나 가짜라고 판명 나면 역풍을 맞기 쉽고, 너무 비즈니스 티가 나도 안 되며, 그렇다고 진짜 사귀는 것도 문제다. 박나래야 워낙 감이 좋으니 기안84와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하고, ‘별빛 충재’를 짝사랑했으며, 성훈과 일명 ‘로판 비주얼 케미’를 뽐내고, 코쿤과 일일 데이트를 하면서도 살아남았지만, 모두가 박나래처럼 할 수는 없다. 무지개 모임의 고정 멤버가 된다는 것은 곧 다른 회원들과 좋은 관계와 케미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꾸 연애의 가능성을 투척한다면 여성 회원의 입지는 좁아질 뿐이다.

낡은 고정관념 반복…여성 시청자는 어디에 공감할 수 있을까

박나래는 러브라인이 필요할 때나, 솜씨 좋게 요리를 할 때는 여성 TO를 일당백 한다. 동시에 무성적인 존재로 취급되거나 아예 ‘브로’로 불리며 남성화된다. 무지개 10주년 여행은 ‘생고생’을 콘셉트로 잡고, 성별 구별이 없는 숙소를 사용했다. 박나래가 아닌 여성 멤버가 있었다면 진행되지 않았을 그림이다. 오직 박나래만이 가족이자 형제의 자격으로 그 여행의 멤버가 될 수 있었다. 전현무는 얼굴에 상처가 난 박나래에게 “면도하다 베었냐”라고 농담하고, 박나래의 인바디 결과는 남자 회원과 같은 평가 기준으로 놀림받는다(남녀는 체지방률 차이가 있어서 비만의 기준이 다른 것이 상식이다). 여성이 여성성을 지우거나 축소함으로써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 남초집단에서 소수의 여성이 살아남는 대표적인 전략 중 하나이자 오랫동안 여성 희극인은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관행과도 겹쳐진다. 박나래는 “비키니는 기세”라는 명언을 남기거나, 겨드랑이에 물을 쏘는 호쾌함으로 굵직한 쾌녀 캐릭터를 구축하며 여성 회원으로서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보는 입장에서는 마음이 씁쓸하다. 여성은 박나래 정도는 되어야 저 자리에 들어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박나래는 굵직한 쾌녀 캐릭터를 구축하며 여성 회원으로서 고분분투한다. MBC 제공

이처럼 성비가 안 맞는 상황에서는 관습적으로 ‘여성성’ 혹은 ‘여성적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 필요할 때 자연스레 박나래에게 독박이 씌워지기 쉽다. 박나래가 없으니까 칙칙했다는 말은 여성이 현장의 꽃이라거나,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낡은 고정관념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코쿤이나 키가 합류하면서 무지개 모임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고, 공감이나 돌봄 같은 요소들이 다른 회원에게 배분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정 멤버인 무지개 모임의 남초 현상이 계속되는 한, <나혼산>이 보여주는 1인 가구의 일상이 누구의 삶인지에 대한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혼산>은 이미 돈 많은 연예인들의 화려한 삶만을 보여준다는 비난을 받으며 위기를 맞았던 적 있다. 처음의 작명 의도야 어떠했든, 다양성을 강조하는 ‘무지개’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편향된 성비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다.

▼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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