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삭감의 그늘...“신임 교수들 과제 씨 마른다” 불안감 휩싸인 신진 연구자들

이병철 기자 2023. 9. 2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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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정부 R&D 예산 16.6%, 교육부 이공계 연구 예산도 26.6% 삭감
3년차 미만 신진 연구자들 “실적 없어 경쟁 자체가 불가능”
불필요한 예산 줄이고, 필요한 곳에 지원 늘려야
지난 8월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R&D 제도 혁신 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를 설명 중인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의 모습. 정부의 R&D 예산 삭감 계획으로 아직 국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신진 연구자 사이에서는 연구를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뉴스1

정부가 내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을 16.6%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과학계에서는 국내 연구 생태계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신진 연구자가 성장할 수 있는 사다리가 사라지면서 국내 과학기술 경쟁력이 퇴보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부는 전체 예산을 삭감하더라도 신진 연구자를 위한 지원 제도를 강화한다는 계획이지만 실제 신진 연구자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불확실성은 더 커지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R&D 예산뿐만 아니라 교육부의 R&D 예산까지 삭감되면서 연구자들의 불안감은 더 크다. 특히 이제 막 연구 활동을 시작한 대학 교수가 지원 받을 수 있는 연구사업의 규모도 크게 줄었다.

교육부는 올해 1월 인문사회·이공분야학술연구지원사업 종합계획을 발표하며 이공계 분야에 대한 연구기반 구축에 지원을 강화한다고 했지만, 이번 예산 삭감 과정에서 관련 예산을 줄였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3일 공개한 ‘2024년 교육부 R&D 예산’에 따르면 내년 이공계 R&D 사업 예산은 올해 5384억원에서 26.6% 삭감된 3951억원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학생수가 점점 감소하는 초·중·고 교육 예산은 여전히 남아도는 반면 대학의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예산은 오히려 삭감됐다”며 “신진연구자에 대한 지원도 대폭 줄어 지난 20여년 간 과학계가 쌓아 온 연구자 육성 시스템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됐다”고 지적했다.

올해 초 수도권 국립대에 신규 임용된 한 교수는 “선배 교수들로부터 내년부터 신임 교수가 할 수 있는 연구과제는 씨가 마를 것이라는 경고를 듣고 있다”며 “특히 내년부터 기본연구 사업의 신규 과제가 사라진다는 것이 가장 큰 타격”이라고 말했다. 기본연구 사업에서는 최대 3년간 매년 약 5000만원의 연구비를 지원한다. 그간 기본연구 사업은 신진 연구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마중물의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적은 예산으로 많은 연구 과제를 제공하는 만큼 해외에서 이제 막 입국해 연구를 시작한 신진 연구자들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연구 사업은 내년부터 신규 과제가 사라지는 것으로 예정돼 있다.

내년 정부 R&D 예산 삭감이 이뤄지면 신진 연구자들이 마주할 문제는 더 커진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예산 삭감으로 신진 연구자들의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예산을 조정했다는 입장이지만, 실제 신진 연구자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과기부는 ‘우수신진 사업’을 기존 450개에서 800개로 늘리고 신진연구자 연구실 초기정착 지원을 늘려 신진 연구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연구현장에서는 “신진 연구자 중 몇 명이나 혜택을 받을 수 있나”라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이 교수는 “우수신진 사업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지원 대상이 박사 학위 취득 후 7년 이내”라며 “기존에 연구 성과를 쌓아 둔 선배 교수들과 경쟁했을 때 대부분 신진 연구자는 사업을 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에서 임용 3년차를 맞은 대학 교수도 “현재 정부의 정책 방향에 갈피를 잡기 어렵다”며 “정부가 신진 교원을 위한 과제를 늘린다고 해도 내가 대상이 될지 가능성부터 살펴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신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불확실하고 막막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토로했다.

중견 연구자에서 시작된 연구예산 삭감의 여파가 신진 연구자까지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교수는 “작년 말부터 중견 연구자들도 사업을 따지 못하면서 점점 신진 연구자를 위한 과제에도 몰리는 경향이 있었다”며 “신진 연구자들은 앞으로 사업을 따고 연구를 계속 할 수 있을지 불안감과 불확실성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학생 위주의 연구 환경도 이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기존에 수행하던 연구 과제의 단가도 삭감이 예상되는 가운데 학생들의 인건비를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서울의 사립대에 지난해 임용된 또 다른 교수는 “계약을 해지하면 되는 박사 후 연구원과 달리 학생들은 졸업까지 교수가 책임져야 한다”며 “현재 받고 있는 연구비에 맞춰 학생을 선발한 상황인데 연구 단가가 줄어들면 재료비를 줄이던 장비 구매를 멈추던 조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진 연구자들이 느끼는 것보다 실제 R&D 예산 삭감으로 인한 여파는 더 클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이덕환 교수는 “현재 가장 타당한 예측으로는 내년 국가 R&D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GDP 대비 1% 가량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며 “단순히 예산 삭감만이 아니라 국내 대학 교육 시스템의 붕괴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디지털 교과서나 인공지능(AI) 활용 교육 등 당장은 불필요한 예산을 줄이고 정말 투자가 필요한 곳에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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