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병자가 된 독일, 우리 미래는 다를 수 있을까
혁신·활력 잃고 병자 신세 돼
우린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그 성공에 안주할까 두려워
“한마디로 박물관이죠.”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의 유럽 평가는 짧지만 매섭다. 10여 년 전 국제 콘퍼런스 참석차 방한한 그는 전광우 당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과 글로벌 경제 전망에 대해 얘기하다 이런 진단을 내놨다. 그리스와 로마, 대영제국 등 과거 화려했던 시절 선조들이 이뤄 놓은 유산과 유물로 먹고사는 박물관 같은 존재 아니냐는 것이다. 유럽은 이제 세계를 이끌어갈 활력과 혁신을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존재라는 일갈이었다. 몇 년 전 이 얘기를 들었는데 유럽에 관한 한 이만큼 통찰력 있는 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유럽 국가들이 장탄식을 하며 “아, 옛날이여”를 되뇌는 사례는 많지만 ‘독일이 병자(病者)가 됐다’는 최근 뉴스는 정말 충격이었다. 경제가 어려울 순 있지만 환자 수준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유럽에선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이 ‘유럽의 돼지(PIGS)’라는 조롱을 받을 정도로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이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으며 심지어 올해는 경제가 역성장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 것이다. 독일도 투병 사실을 인정했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지난 8월 말 대규모 법인세 감면 패키지 법안을 내놓으며 “독일 경제가 병들었다”고 실토했다.
어릴 적 독일(당시는 서독)은 우리가 꼭 본받고 따라가야 할 나라였다. 2차 대전 패전국인 그 나라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때도 여러 사람이 모여 성냥개비 하나로 불을 붙인다고 했다. 정직하고 근면절약했으며 과학과 기술, 산업을 발전시켜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켰다고 했다. ‘한강의 기적’을 꿈꾸는 우리의 롤모델이었고, 경제발전 분야의 ‘큰형님’뻘이었다.
유럽은 미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가난해지고 그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30년 전만 해도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5대국의 합산 국내총생산(GDP)은 미국 전체보다 많았지만 지금은 미국 50주 중 상위 9주 GDP만 합해도 유럽 5대국을 능가한다. 독일의 와병(臥病)은 미국과 함께 서구 문명의 양대 축을 이뤘던 유럽의 처량한 신세를 보여주는 대표적 자화상이다.
나라가 병에 걸렸다는 표현의 원조는 영국이다. 전후 세계 최초로 복지국가 구현에 나섰던 영국은 과도한 복지와 고비용·저효율로 시름시름 앓다 파탄 지경에 몰렸다. 그 원인에 대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조지 앨런 명예교수가 내놓은 분석 중 한 대목에 유독 눈길이 갔다. 그는 ‘영국병’이라는 책에서 “토인비가 말했듯 ‘역사는 한 가지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그룹이 다음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경우가 거의 없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랜 기간의 성공 후에 ‘개척자(대영제국)의 후손’은 안주했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독일병의 발병은 영국병의 판박이다. 과거 성공 모델과 성취에 취해 혁신과 변화를 멀리했다. 미국과 중국이 전기차 개발을 선도하는 동안 독일은 휘발유·경유를 쓰는 내연기관 자동차에 집착했다. 독일 산업은 경쟁력을 잃고 시장에서 밀려났다.
유럽 선진국의 고난을 보면서 우린 이런 전철을 피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벌써 전조 증상이 보이고 있다. 세계 주요 선진국들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불에 올라선 후 몇 년 만에 4만불을 돌파했다. 미국은 7년이 걸렸고, 일본과 영국은 각각 3년, 2년 밖에 안 걸렸다. 우린 2017년 3만불 시대를 열었는데 이후 소득 증가는 제자리걸음이다. 지금 상태론 언제 4만불이 될지 가물가물하다. 작년 기준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국 중 33위다. 우린 지금까지 잘해왔다. 하지만 혁신과 개혁 쪽으로 발 내딛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지 모를, 지금까지의 성공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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