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줌인/임현석]삶이 호러가 되는 순간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2023. 9. 24.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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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잠’ 속 한 장면. 수진(정유미)이 침낭에 들어간 채로 잠든 남편 현수(이선균)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다. 현수는 잠만 들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상 행동을 벌여 공포감을 자아낸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잠’은 극 초반 설정상 악의를 지닌 인물이 없다. 오가는 길 먼저 말 붙이는 선한 아랫집 이웃, 강아지를 키우며 출산을 준비하는 윗집 밝은 부부가 있을 뿐이다. 이웃끼리 작은 선물을 건넬 땐 호의가 교차한다. (*이 칼럼엔 영화 ‘잠’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그러나 이웃과의 관계는 주로 한시적이며, 미세한 균열만으로도 지옥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우리네 삶 도처에 그러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방아쇠가 있고 이는 우리 자신조차도 언제 어떻게 당겨질지 모른다.

부부나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타인을 온전히 다 알 순 없으며, 화합하려 애쓰는 마음이 진심이라고 해도 잘못해서 상대의 방아쇠를 건드리고 대화가 삐끗하고 수틀릴 수 있다. 악의가 없이도 문제는 벌어진다.

도처에 밟지 말아야 할 지뢰가 많은데, 무엇이 지뢰인지 모르겠을 때 삶은 호러가 된다. 영화 잠은 나를 언제든 광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방아쇠와 지뢰의 존재를 보여준다. 영화 속 방아쇠는 가족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선한 동기다.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광기에 휩싸일 수 있는 나 자신도 공포의 대상이 된다.

만삭 임신부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 부부에게 공포의 대상은 일차적으론 현수의 밤중 무의식이다. 어느 날 수진은 옆에 잠든 남편 현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들어왔어.”

수진은 이날부터 현수가 심상찮다고 느낀다. 급기야 현수가 수면 중 갑자기 일어나서 이상 행동을 벌이는 것을 본다. 현수는 잠에 취한 채로 걸어다니며 냉장고에서 생고기와 날계란을 거칠게 씹어 먹는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고 하자 수진은 기겁한다. 그제야 지속적인 야간 층간소음에 점잖게 하소연하던 아랫집 이웃 민정(김국희)의 말도 이해가 간다.

현수는 밤중 부부가 기르던 강아지를 냉동고에 집어넣어 죽이기까지 한다. 아이가 태어나자 수진의 불안은 노이로제 수준이 된다. 혹시 남편이 아이를 무심결에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여기서 현수의 무의식에 수진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운명을 보여준다면, 일반적인 공포 영화의 문법을 따르는 셈이다. 그러나 현수는 진심으로 수진을 걱정하고, 치료법을 찾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수진은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과 불안감 속에서도 현수와 생활을 분리하는 대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해법을 찾고자 한다. 부부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집 벽에 걸린 가훈대로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일이 없다.’

수진은 남편 현수가 공포의 대상이지만 피하는 대신 어떻게든 고치려고 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뒤틀리거나 광기로 치달아가기 쉬운 감정이다. 벽에 걸린 가훈을 비출 때마다 수진의 표정 또한 점점 의미심장해진다. 평범한 가훈에 담긴 함의가 문득 섬뜩하게 느껴질 때, 극이 기대 온 공포 감정과 문법이 크게 비틀린다.

영화는 제한된 공간의 디테일을 통해서 인물의 감정선을 보여줄 만큼 촘촘하다. 반면 대조적으로, 서사에선 과감한 생략이 돋보인다. 그리고 생략을 통해 해석의 여지를 크게 열어젖힌다. 철저하게 계산된 열린 결말엔 고개를 끄덕인다. 관객 저마다의 관점과 처지를 다시 환기하게끔 하는 구석도 있다.

다양한 해석으로 열려 있는 결말은 저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상과 삶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이 느껴진다. 각자 믿음만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합리적으로 처신하려면 ‘혼이 실린 구라(거짓말)’라도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우린 아무리 애써도 결국 아무런 진실도 모르는 채로 떠내려가고 마는 것일까.

남편 현수가 미친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할 때 타인을 대상화하는 일반적인 용례와 달리, 자기 성찰적인 자조처럼 느껴져서 여운이 길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섬세한 태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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