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져도 다시 일어선다 ‘기후정의’ 향해
참가자들, 두 방향 나눠 서울 시내 걸으며 ‘다이 인’ 퍼포먼스
지난 23일 오후 4시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과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난해에 이어 약 3만명(주최 측 추산)의 시민이 아스팔트 길바닥에 몸을 뉘었다. 이미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더 심각해질 기후재난을 경고하며 시민들은 ‘죽은 듯한’ 모습을 표현했다. ‘다이 인(die-in)’ 퍼포먼스를 벌이던 시민들은 이내 울려 퍼진 퀸의 ‘위 윌 락 유’에 맞춰 일어나 발을 굴렀다.
‘9·23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는 이 퍼포먼스에 대해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이라는 슬로건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서울 중구 시청역·숭례문 인근에서는 청소년·대학생·시민단체·정당·노동조합 등 각계각층의 600여개 단체가 모여 만든 ‘9·23 기후정의행동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기후정의행진이 개최됐다. 서울에서 모인 약 3만명 외에 제주, 대전, 부산 등에서도 약 1000명이 모여 별도로 행진을 벌였다.
■ 구체적 요구 외치며 행진
지난해 기후정의행진은 2019년 이후 3년 만에 열린 대규모 집회로, 3만5000여명이 모였다. 기후운동은 물론 환경 분야 집회로는 최대 규모 행사였다. 지난해 행진이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조치를 이어가고 있는 정부에 맞서려는 연대 의식을 확인하는 자리였다면, 올해는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요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청소년들은 ‘위기감’을 손팻말로 표현했다. “우리에겐 어른이 될 시간이 없어요” “기후재난으로 죽기 싫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같은 문구들은 정부, 지자체, 기업 등으로 대표되는 어른들의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에 대한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청소년 대표로 단상에 오른 전북 무주 푸른꿈고등학교 2학년 한주원군은 “우리의 저항, 우리의 사랑이 끝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본집회에서는 빈민, 노동자, 환경단체 활동가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참석자들이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본집회에서 권우현 조직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은 “기후위기가 일자리와 거주 공간을 위협하고 생명의 위기로 닥쳐오는 동안 정부는 스스로의 역할을 포기했다”며 “윤석열 대통령은 온실가스 뿜어대며 미국까지 날아가서는 유엔 기후정상회의에는 참석도 안 했다”고 비판했다.
김영훈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전KPS비정규직지회장은 “발전소 노동자들도 석탄화력발전소의 시대는 종식되어야 한다고 동의하지만 석탄화력발전소가 폐쇄되어도 우리의 삶이 폐쇄될 순 없다”고 말했다. 이어 “2만5000명의 발전소 노동자가 일터가 사라지는 것을 알면서도 일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없다”며 “환경과 사람 그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손잡고 함께’ 기후정의를
오후 3시쯤부터 참가자들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한쪽은 종로 SK그룹 본사 건물과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을 거쳐 광화문 정부서울청사까지, 다른 한쪽은 서울역을 거쳐 용산 대통령실 앞까지 이동해 마무리했다.
행진에선 책임이 있는 대상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는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정부가 기후위기 대응을 하지 않고,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열 살 아들, 배우자와 함께 쓰레기를 줍던 박제리씨(43)는 “새만금에 짓는 공항, 재생에너지 지원이 적어지는 것처럼 정부 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며 “국회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이들은 종로1가 SK그룹 건물 앞에 멈춰 SK 측에 석탄화력발전 중단, 감축을 요구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석탄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SK를 특정해 책임을 물은 것이다. 또 참가자들은 영풍문고 앞에서 “환경파괴 자행하는 영풍제련소 낙동강에서 떠나라” “환경범죄기업 비호하는 환경부 규탄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하천 오염을 일으키고 있는 영풍제련소와 이 업체에 조건부 운영 허가를 내준 환경부에 책임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반려견과 함께 참석한 고운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는 “기후정의라는 말 자체가 낯선 말이었는데 2~3년 만에 많이 알려졌다”며 “상황이 안 좋아지는 속도도 빠르지만, 시민들이 함께 기후정의를 외치는 속도도 더 빨라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강한들·김기범 기자 hand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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